22/09/08 20:09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가족 여행에서 배운 것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첫 문장으로 꼽힌다. 제주에서 한 명의 여행자로 살고 있는 나는, 다양한 여행자를 만나는 나는 톨스토이의 문장을 이렇게 고쳐 쓴다.

“행복한 가족은 함께 여행을 떠나지만 불행한 가족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여행을 멀리한다.”

제주로 가족 여행을 온 지인들을 그간 여러 번 만났다. 여럿이 같이 다니려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함께 여행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 자체로 행복해 보였다. 특히 여행하는 아이들은 늦은 저녁 학원에서 나오는 아이들과는 얼굴빛이 달랐다. 정해진 틀이나 경계도 없이, 주저하지 않고 바닷가를 달리고 모래밭에서 뒹구는 아이들을 보며 유희의 원형 같은 것을 발견했다. 단순한 기쁨을 포착했다.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물론 한순간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특정한 기준으로 행복한 가족을 규정할 수는 없다. 행복과 불행 역시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가족 여행이 마냥 즐겁고 평탄하게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여행은 익숙한 환경과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누구나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가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지켜야 할 의무와 가족으로서의 책임도 수반된다. 어느 곳 하나 아픈 사람이 발생하면 여행은 고행이 되고, 때때로 사소한 것에도 의견 충돌이 발생한다. 각별한 친구나 연인조차 여행을 가서 틀어지는 경우가 허다한데, 여행의 즐거움 이면에 그만큼의 어려움이 공존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나는 혼자 하는 여행보다 부모님을 모시고 떠난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여행을 즐기는 데도 꽤나 많은 훈련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가족 여행 초창기, 어렵게 시간을 내 강원도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는데, 부모님은 출발하자마자 차가 막힐 것 같다며 집에 가자고 하신다. 휴게소에 들러서는 집에 가서 쉬자며 집에 가자고 하신다.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서는 밥을 다 먹었으니 이제 집에 가자고 하신다. 모처럼 여유 있게 바다를 바라보면서는 경치가 좋으니 그만 집에 가자고 하신다. 집에 무슨 보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집에 가자고 하신다. 이런 증상은 당일치기 여행이 아닌, 제주로 길게 여행을 오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비로소 함께 여행을 즐기게 됐다.

나는 모든 여행자에게 가족 여행은 필수라고 제언한다. 가족 여행 자체가 살아 있는 교육이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과 공감 능력, 유대감, 인내심, 책임감, 순발력, 적응력, 체력, 잘 먹고 잘 노는 능력을 자연스럽게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가장 소중한 자산은, 몰랐던 가족의 모습을 발견한 것에 더해 내가 진짜 어른이 됐다는 자각이었다. 혼자서만 여행을 다니던 내가 오롯이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이었다.

혼자 멋진 풍경을 보거나 맛있는 걸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고 같이 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그 정도 마음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부모님이 가장 젊은 오늘, 아이들이 가장 빛나는 오늘, 함께 떠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열한 번째 칼럼입니다. 가족 여행은 어른이 되는 여행입니다.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rJ1vsMDDGJ000&pageIndex=1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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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8/18 11:39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여름에 만난 사람들
1. 제주공항과 인접한 아름다운 해안도로. 제주시 도두동에 있는 무지개해안도로를 걷는다. 한 청년이 무슨 영문인지 나를 반기며 달려오다시피 한다.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그는 거침없이 무언가를 건넨다. 핸드폰이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사진 촬영이 그렇게 들뜬 목소리로 해야 하는 부탁인가 생각하던 찰나, 한 사람을 더 발견한다. 몇 걸음 뒤에서 여자 친구로 추정되는 인물이 옷매무새를 분주히 가다듬고 있다.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기운이 뭔가 불길하다.

이 시간 이후부터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셀카봉과 삼각대이다.
하트! 뽀뽀! 제주 최고!

그들은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커플이 할 수 있는 모든 포즈를 연출한다. 지나친 애정과 풍부한 표현력을 과시한다.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족히 스무 장은 찍어준 것 같다. 그들에게는 그저 멍하니 걷는 내가, 혼자인 내가 사진을 대량으로 찍어줄 적임자로 보인 것이다. 먼 바다를 바라본다. 내가 이러려고 모든 걸 내려놓고 제주에 왔구나. 산전수전 다 겪으며 모진 세월을 견뎌 왔구나. 나를 불타오르게 만드는 건 한여름의 태양만은 아닐 것이다.

2. 무더위와 짜증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시원함. 서귀포시 돈내코유원지 안에 위치한 원앙폭포는 물놀이하기 좋은 계곡이다. 제주에서 이곳보다 시원한 장소는 찾지 못했는데, 마음속 번뇌가 한순간에 오그라들 정도로 물이 차갑다. 나는 발목만 담그고도 득도를 할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있었고, 계곡 한가운데서는 겁 없는 아이처럼 첨벙이던 남자가 있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그였다. 제주 여행에 한창 빠져 있던 시절 종종 들르던 게스트하우스 사장이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그는 10년 넘게 해오던 일을 접고 이제 곧 서울로 올라간다고 했다. 누군가는 서울로 가고, 누군가는 제주로 온다. 누군가는 제주에서 첫 여름을 보내고, 누군가는 마지막 여름을 보낸다. 얼음장 같은 계곡물이 흐르는 원앙폭포에서 여름과 겨울이 교차했다.

3. 아이스크림 하나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여름이 그렇게 괴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제주 동문시장에 자주 들르면서도 그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시장 안쪽 상점에서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닌, 시장 주변 인도를 따라 좌판을 벌여놓고 물건을 파는 할머니들. 주로 채소나 나물, 소소한 것들을 취급하는 네다섯 명의 할머니들이 붕어 모양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환하게 웃는다. 제주 할머니들은 늘 무뚝뚝한 이미지였는데 저렇게 밝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다. 할머니들의 대화에서 웃음꽃이 피어난다. 제주 방언이 상당수 섞여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 행복을 표현하는 언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온다. 뜨겁던 여름이 녹아내린다.

결국 여름의 괴로움은 지나갈 것이고 행복은 찾아올 것이다.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커다란 행복을 기다리기보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작은 행복을 지나치지 않는다면.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열 번째 칼럼입니다. 여름의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qekxrsDDGJ000&pageIndex=1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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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7/28 14:10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제주의 여름과 여름의 나
땅이 녹아내린다. 땀이 흘러내린다. 몸이 늘어진다. 끈적인다 몸이. 태양이 작열한다. 여름이 방학을 끝냈다. 폭염주의보가 발효되었으니 야외 활동을 자제해 달라는 방송이 마을에 울려 퍼진다. 잠시만 피부가 햇빛에 노출돼도 피부과 레이저처럼 따갑다.

제주의 여름은 중년인 나를 20대 시절로 되돌려놓았다. 뜨겁던 그때로 나를 인도했다. 한 가지 일에 도전했다. 그건 제주에서 불가능하다는 옆집 아저씨의 말에 자극받아 끝까지 견뎌보기로 했다. 여름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유토피아는 없다는 생각을 줄곧 견지하고 있다.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이없게도 에어컨이 펑펑 나오는 읍내 마트에서 처음 했다.

7월 초까지 에어컨을 틀지 않고 버텼다. 에어컨이 없었을 땐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었다. 집에서든 차에서든 틀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포기했다. 한낮의 열기와 계속되는 열대야. 숨이 턱턱 막혔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진이 빠졌다. 제주 특유의 높은 습도가 체감 온도를 끌어올렸다. 샤워를 해도 그때뿐이었다. 바보 같았지만 의미 없는 도전은 아니었다. 그새 몸무게가 4킬로그램이 빠졌다. 20대 때의 몸무게로 회귀했다. 제주의 여름은 아무것도 없지만 무엇이든 도전했던 그때의 여름과 닮았다.

여전히 에어컨 가동은 자제한다. 대신 자연에서 더위를 식힐 방법을 찾는다. 이렇게 뜨거운 여름을 안겨준 제주는 사실 대한민국 최고의 피서지가 아니던가? 언제까지 낙원에만, 아니 읍내 마트에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해변으로 향한다. 제주에서도 손꼽히는 금능, 협재해수욕장이 아닌 작은 해변으로 향한다. 인파로 북적이지 않는 곳으로 간다.

표선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평일에도 사람들이 많다. 예상했다. 사막 같은 해안사구와 현무암 지대를 건너 옆에 있는 해변으로 간다. 어떤 비밀한 경계를 건너간다. 이내 내 앞에 펼쳐지는 건 소금막해변. 유명한 해수욕장 옆인데 이상하리만치 사람들이 드문드문하다. 한적하다. 그 규모도 작고 물빛이든 백사장이든 특별한 것은 없으나 부족한 것 또한 찾을 수 없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기분은 좋으면 받아들이고, 싫으면 기분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가만히 해변을 바라본다. 서프보드를 들고 있는 사람, 개와 산책하는 사람, 파라솔 아래 낮잠을 자는 사람, 그렇게 해변과 하나가 된 사람들을 바라본다. 잔잔한 파도가 나를 부른다. 아직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지 않은 모래밭을 달려 바다로 뛰어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넘어질 거라는 것을. 소금막해변은 마치 내가 해변을 소유한 것처럼,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유유히 평화롭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잠시 잊고 있었다. 해변에는 그늘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여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는 걸. 산이든 강이든 바다든 그 어디든. 지금 소금막해변의 사람들처럼.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아홉 번째 칼럼입니다. 아직 여름입니다. 그것도 한여름.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pzRAGADDGJ000&pageIndex=1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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