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0 12:23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 인도의 맛 2 먹는 것과 사는 것
인도는 맛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혼자서는 낼 수 없는 맛. ‘나마슈떼’라는 이름으로 함께 밥을 먹던 그곳에 우리가 잠시 살았다.

“요리 좀 해보셨어요?”

인도로 봉사활동을 떠나기 전, 봉사단 담당 직원들로부터 들은 얘기는 그게 전부였다. 그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나를 포함한 인솔자들에게 부여된 역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세 번, 23명분의 식사를 책임지는 일이었다. 봉사단 학생들이 현지 교육봉사와 노력봉사(농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내 요리 실력이었다. 10년 넘게 혼자 살며 정립한 내 요리 철학은 단순했다.

“먹을 수 있는 걸 만들자.”

인스턴트 음식을 싫어하는 탓에 요리는 종종 하지만, 생존을 위한 것이었을 뿐, 맛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음식 재료들이 다 따로 노는 기현상을 경험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거 누가 만들었어? 만든 사람 나오라고 해!”

누가 내 멱살을 잡고 있었다. 나였다. 봉사단 학생들에게도 그런 소리를 들을까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사전에 프랑스 요리학교라도 등록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나 혼자 먹는 밥이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었다. 열악한 조리 시설과 한정된 재료, 위생 상태 등 극복해야 할 문제들도 산적해 있었다. 나는 인도에 있었다.

인도 주방 신고식은 짜장밥이었다. 카레라이스가 아닌 짜장밥인 것부터가 미스터리였다. 내가 맡은 파트는 밥을 짓는 일이었는데, 놀랍게도 대형 전기밥솥이 있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네, 라며 플러그를 꽂던 그 순간, 전기 합선으로 밥솥에 불꽃이 튀었다. 먼저 수명을 다했다.

결국 인도 전통 방식으로, 커다란 철제 솥에 물을 가득 넣고 쌀이 익을 때까지 주걱으로 저어서 밥을 만들었다. 처음 보는 조리 기구에, 특성이 다른 쌀로 만든 밥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설익은 밥을 먹는 학생들을 보니 밥이 목에 걸렸다. 돌도 씹어 먹을 그들의 나이가 아니라 불평 없이 밥을 먹는 그들의 마음이 마음에 걸렸다.

매일 아침 식빵을 구웠다. 토스터기 없이 다량으로 굽다 보니, 열전도가 고르지 않은 철제 판에 익히다 보니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못생긴 빵, 타 버린 빵이 나왔다.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중 하나를 입에 넣었다. 쓴맛을 곱씹으며 먹고 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일 뿐만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 바로 나였다.

2주간의 체류 기간 동안 인도 현지 음식을 맛볼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커리가 대표적이었는데, 내가 주목한 건 마살라(인도의 혼합 향신료)였다. 재료가 무엇이든 살려내는 마법의 가루. 야채 커리에서도 고기 맛이 났다. 한국으로 치면 라면 스프였다. 수입이 절실했다. ‘난’도 빼놓을 수 없었다. 밀가루 빵이 그렇게 소화가 잘 되는지 몰랐다. 무한정 배 속으로 들어갔다. 탄두리 치킨은 실제로 타 있었다. 요리사가 나와 비슷한 성향인 듯했지만, 인도의 맛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짜이(인도식 밀크티)는 마실 때마다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신호가 찾아왔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맛이었다.

소를 신성시하는 인도에서 가장 특이했던 건 염소 고기였다.

“왜 소고기는 먹지 않으면서 염소 고기는 먹는 걸까요?”

내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묻자 언어학자인 단장님이 답했다.

“소를 못 먹으니까 염소를 먹는 거지.”

“…….”

하지만 이 모든 음식보다 더 맛있었던 건, 우리가 만든 밥이었다. 혼자서는 낼 수 없는 맛. 인솔자들이 모두 나 같았다면 인도는 단식원이 됐겠지만, 우리에겐 대장금이 부럽지 않은 인솔자들이 있었다.

“어제 닭을 먹었으니 오늘 메뉴는 닭이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구할 수 없고, 조리 기구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닭볶음탕, 닭고기미역국, 찜닭, 닭칼국수, 닭죽, 닭튀김 등 닭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그 어려운 걸 해냈다. 그들의 손맛 덕분에 학생들이 지치지 않고 봉사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었다.

“미안하고,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살면서 2주 동안 함께 밥을 먹을 사람들이 또 있을까. 봉사단은 같이 밥을 먹는 식구, 사랑한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어 갔다.

비싼 향수를 뿌리고 인도로 출발했다. 그곳에서는 의미가 없는 향기였다. 어느새 내 옷에는 빠지지 않는 음식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인도 아이들을 돌보던 학생들처럼,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던 날들. 내가 입고 있던 것이 인도의 향기였다. 인도의 맛이었다. 기억해야 할 삶이었다.


우희덕_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위클리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그 열 번째 칼럼입니다. 또 다시 그리운 시절의 얘기네요 ^-^

칼럼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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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30 17:06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 인도의 맛 1 있는 것과 없는 것
“인도에는 많은 것이 없다. 기분 좋아지는 맑은 공기도, 길가에 건강한 강아지도 없다. 도로에 중앙선도, 교통질서도 없다. 화려한 간판도, 친숙한 언어도 없다. 하늘에 닿을 듯한 높은 건물도 없다.”

서울에서 인도 콜카타까지 4,034킬로미터. 콜카타에서 180킬로미터 떨어진 산티니케탄 지역 작은 마을. 봉사단 이름 ‘나마슈떼’. 인솔자 4명과 대학생 19명. 2020년 1월 운명처럼 주어진 14일.

봉사단 학생들의 눈에 비친 인도는 그랬다. 없는 것이 많았다. 인솔자로 참여한 나는 이 모든 게 ‘업(Karma)’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마주하고 겪어내야만 하는 것들. 감내하기 힘든 일들. 나는 인도에 있었다.

“저거 미세먼지죠?”

인도 첫날 콜카타 공항 밖을 나서며 누군가 말했다. 나는 그게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미세먼지는 무슨. 어디 불난 것 같은데?”

공항 주변은 온통 잿빛이었다. 젖은 나무나 플라스틱을 태우는 것처럼 매캐했다. 이건 공기가 아니라 연기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화력발전소와 셀 수 없이 많은 자동차, 수많은 벽돌 공장과 소각장이 인도에 있었다. 다시 공항으로 돌아온 시점까지, 어디를 가더라도 선명하게 보이는 곳이 없었다.

“이런 생각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인도로 출국하기 전날, 짐은 줄여야 했고 수저 케이스는 필요했다. ‘KF94’라고 찍혀 있는 비닐 포장지가 보였다. 담겨 있던 마스크를 모두 뺐다. 그 빈자리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넣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그런 생각을 안 하는 이유가 있었다. 매일 콧속에서 그을음이 묻어 나왔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광산의 주인이 됐다. 애초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기려고 한 게 문제였다. 인도에서 손으로 밥을 먹는 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경적을 한 번 누르면 다섯 번씩 소리가 나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 가속 페달을 밟으면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인도의 도로는 인도의 축소판이었다. 사람과 동물, 바퀴가 달린 모든 교통수단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도로에 중앙선도, 교통질서도 없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경적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경찰차가 앞에 있어도 경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도 신호 위반이 있을까요?”

내가 넋이 나간 얼굴로 묻자 언어학자인 단장님이 답했다.

“신호가 있어야 위반을 하지.”

“…….”

하늘에 닿을 듯한 아파트는 없었다. 현지 학교에 도착해 방을 배정받았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못이 삐져나온 합판과 고무 매트를 깔았다. 밤에는 제법 쌀쌀했지만 제공 받은 침낭은 한산 모시처럼 얇았다. 다음날 아침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입이 반쯤 돌아갔다. 때때로 전기가 끊겼고 물도 나오지 않았다. 욕실이 아닌 화장실에서 씻어야 했고 위생 상태도 열악했다.

“시설이 생각보다 좋아서 감사해요.”

온종일 경적 소리에 시달려 환청이 들린 걸까. 봉사단 학생들은 감사하다고 했다.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깨달음이 인도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갖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인도 아이들을 처음 만난 날, 봉사단 학생들의 빛나는 눈빛을 기억한다. 소외된 아이들,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과 교감하는 그들을 보며 언어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사랑이었다.

도무지 아무것도 자랄 것 같지 않은 땅에 씨앗을 뿌리며, 콘크리트 숲에서 살아온 그들은 노래를 불렀다.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땀을 흘렸고, 인도 사람들처럼 웃을 수 없을 때 웃었다.

고된 하루가 끝난 밤. 옥상에 매트를 깔고 누운 학생들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이렇게 행복해도 돼?”

여전히 탁한 하늘에서 별이 빛나고 있었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하늘에서 별이 빛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하늘에서 별이 쏟아졌다.

업(Karma)이라고 생각했지만 인연이었다. 인도에서 봉사단 학생들은 내게 영감을 주는 시인이었고, 척박한 땅을 깨우는 농부였고,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의 선생님이었다.

봉사단 학생들의 눈에 비친 인도는 그랬다. 없는 것은 있는 것이었다.

“인도에는 맑은 공기는 없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과 새하얀 구름이 있다. 건강한 강아지는 없지만, 목줄 없이 길가를 뛰어다니는 강아지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행복이 있다. 중앙선과 화려한 간판, 높은 빌딩은 필요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웃음에는 순수함이 느껴졌고, 마을에는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이런 인도에 빠질 것 같다.”


우희덕_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위클리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그 아홉 번째 칼럼입니다. 그리운 시절의 얘기네요 ^-^

칼럼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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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8 12:24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 결혼 못하는 남자
결혼은 현실이고, 현실은 생활을 말한다. 사회생활은 비대면이 대세고, 비대면이 사회의 현실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순했다.

“결혼식은 유튜브로 볼 수 없어?”

마흔 이후 여간해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상이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거나, 나보다 고령이 아닌 이상, 결혼은 남의 일이었다. 축의금은 따로 챙기지만, 식장에 가는 건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른바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미혼 남성에게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상황이 불가피하게 됐네요.”

후배가 건넨 청첩장이 그 어느 때보다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결혼식이라니.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거리 두기로 잘 만나던 연인과도 헤어지는 마당에 결혼식이라니. 평소에도 자가 격리가 생활화되어 있는 내게 도심 한복판 결혼식이라니. 결혼에 눈 감은 나를 두고 혼인 서약의 증인이 되어 달라니.

사랑은 용기를 만들었다. 반대일지도 모른다. 선후 관계를 떠나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나는 반대였다. 선후배 관계를 떠나 절박한 심정이었다. 설명이 필요했다.

“너무 섭섭해 하지 마. 이런 상황이면, 나는 내 결혼식에도 안 갈 테니까.”

그는 내 사정을 이해하는 눈치였다. 결혼식 참석에 관한 한 내 판단을 존중하겠다는 태도였다. 다만 그는 “밥이 맛있는 걸로 유명한 곳”이라며 피로연장의 음식 사진을 다량으로 내게 전송했다.

복잡한 사정을 뒤로하고 결혼식에 참석했다.

“여어, 살아 있었네!”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하객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거대한 착각이었다. 사랑과 결혼. 전쟁과 평화. 오만과 편견. 내가 참석한 결혼식 중 역대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렸다. 최소한 다섯 쌍 이상이 합동결혼식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후배가 먼저 가니까 마음이 짠해?”

인공 눈물을 넣은 것처럼 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내가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삼켰다.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결혼식은 없어….”

결혼식장 로비는 만원 버스였다. 하객들은 승객들이었다. 그들에게 떠밀리며 생각했다. 내 인생에 내가 주인공인 결혼식이 있을까. 몰디브를 혼자 여행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 내가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을까.

결혼 못하는 남자, 라는 자기 암시를 시작한 건 10여 년 전이었다.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를 보고 나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은 결혼을 꿈꾸는 이들과 반대 지점에 서 있다. 성격 개조, 인격 박탈, 시간 낭비, 아이 없는 삶 등의 얘기가 오고 간다. <결혼 못하는 남자>에서 유일하게 맘에 들지 않은 내용은, 결혼 못하는 남자가 결국 결혼을 한다는 점이었다.

드라마는 현실의 반영일 뿐 현실의 이야기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보다 생생한 건 체험 삶의 현장의 목소리였다. 결혼을 경험한 지인들의 얘기는 다양했다.

“너 꼭 결혼해. 나 혼자 당할 수는 없어.” “축의금 회수해야지. 지금까지 뿌린 게 얼만데.” “갔다 오더라도 일단 해봐. 마음 단단히 먹고.” “남에게 피해주지 말고 혼자 편하게 살아.” “결혼은 미친 짓이야.” “아니야. 결혼은 무효야.” “부숴 버릴 거야.”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언급이 다수였지만, 결혼을 긍정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결혼 못하는 남자를 압도할 만큼 단단했다.

“소설가는 고독해야 해.”
“그건 미식가 얘기지.”
“글을 쓰려면 고독은 불가피한 거야.”
“결혼한 소설가도 잘만 쓰더라.”
“고독은 가장 큰 축복이야.”
“가장 큰 저주는 사랑을 글에 가두는 거야.”

결혼을 하나의 관점과 틀로 규정할 수는 없었다. 사람이 중요했다. 매일 아내에게 도시락을 싸주는 후배를 보며 생각한다. 저렇게 해야 사랑받는구나. 매일 술 먹고 늦게 들어가는 친구를 보며 생각한다. 저렇게 하면 쫓겨나는구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결혼식이 시작도 되기 전에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당사자들은 어땠을까. 결혼은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신랑이 된 후배와 인사를 나누며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밥이 맛있는 걸로 유명한 곳.

지친 몸을 이끌고 피로연장으로 향하던 그때, 내 앞날을 암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내 직원이 크게 소리쳤다.

“피로연장 만석입니다. 못 들어가십니다.”


우희덕_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위클리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그 여덟 번째 칼럼입니다. 글쓰다 보니 여름이 왔네요 ^-^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QyZPQEDGJM000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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