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4 17:26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오름에서 내려놓기
때로는 엄연한 사실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제주는 섬인 동시에 산이다. 화산섬이다. 포구에 산책을 나가거나 해변에서 먼 바다를 바라볼 때 뒤쪽에 산이 있음을 망각하곤 하는데 산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제주를 표상하는 한라산 외에도 마을 뒷산처럼 곳곳에 자리 잡은 오름이 360여 개나 된다. 하루에 한 곳씩 매일 오름을 오른다고 해도 1년가량 시간이 걸린다.

오름은 화산분출물에 의해 형성된 작은 산이나 봉우리를 뜻한다. 엄연히 산이다. 제주를 제주답게 하는 자산이다. 언뜻 형태가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오름은 하나도 없다. 저마다 고유한 이름이 있고, 높이가 다르고, 오르는 길이 다르고, 식생이 다르고, 풍경이 다르고, 스치는 바람이 다르다. 내가 가본 오름 중 몇 곳만을 떠올려 봐도 그 기억과 감흥이 중첩되는 곳은 없다.

람사르습지에 지정될 만큼 원형 그대로의 자연환경과 둘레길이 인상적인 물영아리오름, 가을 억새철 오름의 여왕으로 불리며 부모님과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따라비오름, 긴 탐방로를 자랑하며 정상에서 한라산 전경을 그윽하게 조망할 수 있는 큰노꼬메오름은 오름에도 선택지가 있음을 말해 준다. 방송을 타고 유명해진 금오름은 굉장히 묘한 곳인데, 제주가 당면한 현실을 압축해놓은 여행지다. 금오름은 일몰이 다가오는 시간 가장 오묘하고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제주의 고질적인 축사 악취 문제를 목도할 수 있는 곳이다. 또 분화구까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오름이라 그만큼 훼손도 많은 실정이다.

오름은, 오름을 오른다는 것은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짧은 시간 삶의 속성을 자각하게 한다. 이게 쉬워 보여도 쉽지 않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 20분이면 충분한 오름도 있지만 1시간 넘게 소요되는 곳도 있다. 만만하게 보고 접근했다가 낭패를 본다. 오름에는 꽃길이 펼쳐지지 않는다. 도처에 진드기 같은 해충과 가축 배설물이 도사리고 있다. 접근할 수 없는 통제구역도 많다. 이윽고 정상에 오르면 해냈다는 성취감과 개방감에 도취된다. 한동안 눈앞에 펼쳐진 그림 같은 장면들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하지만 정상에는 그늘이 없다. 쉴 곳이 없다. 강한 햇살과 매서운 바람이 쉴 새 없이 파고든다. 이내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걸 인지한다. 오르막길은 오르막길대로 힘들고 내리막길은 내리막길대로 힘들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내려와서는 오름에 그만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고는 어느새 망각의 주인이 되어 다시 오름으로 향하는 나를 발견한다.

복잡한 마음을 오름에 내려놓는다. 오름은 상승을 위해서가 아닌 잠시 멈추기 위해 존재함을 깨닫는다. 나를 넘어 내 주변을 돌아본다. 그리고 염원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좇기보다 내가 있는 곳이 아름다울 수 있기를. 삶에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기를.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열네 번째 칼럼입니다. 언젠가 제주의 모든 오름을 다 올라보고 싶네요.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ContentView.es?mid=a10205000000§ion_id=NCCD_PUBLISH&content=NC002&code_cd=0105000000&news_id=5e5eb98e-2913-4ff6-9572-ba35c540d07d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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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10/24 16:54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헌책방과 네잎클로버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계절을 오독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여행이든 나들이든 밖에서 활동하기 가장 좋은 시기에 가만히 책을 붙들고 있는 건 인간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미학적인 언어처럼 아름답지도, 무한한 상상처럼 자유롭지도 않다. 가을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그 투명함이 어디서 오는지, 왜 잠자리가 코스모스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지 알고 싶다면 잠시 책을 덮어두자. 가을은 방학으로 생각하고 대신 미세먼지가 극성인 봄, 태양이 이글거리는 여름, 칼바람이 부는 겨울을 독서의 계절로 명명하자. 가을에 야외 활동도, 독서도 포기할 수 없다면 전국 각지의 책방을 거점으로 여행을 떠나는 게 절충안이 될 수 있다.

제주로 이주하며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대부분 기부하거나 폐기했다. 삶과 문학에서 떼어 낼 수 없는 영원한 주제는 아이러니인데, 책을 처분하고 나니 책이 다시 필요하게 됐고, 다시 읽어야 했고, 몰랐던 책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됐다. 처음에는 책을 대량으로 구입하기 위해 헌책방을 찾았는데, 글이 잘 써지지 않아 오래된 책들을 뒤적이며 이야기를 찾았는데, 정작 이야기는 책 밖에 있었다. 책 내용과 무관하게 책방 주변에서 하나둘씩 이야기가 펼쳐졌다.

‘동림당’은 제주에 있는 헌책방 중에 압도적으로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다. 그만큼 관리 요소가 많은 곳이다. 유쾌한 장년의 남자, 무슨 얘기든 막힘없이 이어가는 사장님에게서 오랜 시간 책방을 지탱해 온 내공이 전해졌다. 지금까지 그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한, 이성 중심 사고 체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말까지 듣게 됐다.

“와, 책이 엄청 많네요?”
“독서에는 책이 좋죠.”
“…….”

이곳에 진열된 책에서 비상금으로 추정되는 지폐가 다량 발견되기도 했는데, 누군가 돈이 든 책을 팔았다는 것도 기막히고, 그걸 발견한 손님이 판매자를 찾아달라고 스스로 밝힌 것도 대단했다.

‘구들책방’은 함덕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해 있다. 여행자들이 유명 관광지에 와서도 책방을 찾는다는 걸 알려준 곳이다. 이곳에서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을 구입했는데, 책 속지에 명문 의과대학 이름과 학생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문득 그것이 사실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바람을 새긴 것일까 의문을 갖다 포털 사이트에 그 이름을 검색했는데, 학생은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모 의과대학 교수가 되어 있었다.

‘그늘중고책방’은 그야말로 소규모 책방이지만 마음이 가는 곳이다. 연로한 할머니가 작은 공간을 지키고 있는 것도 마음이 쓰였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이곳에서 찾았다. 한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견해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는데, 책 속에 짙은 초록을 간직한 네잎클로버가 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행운인가 싶어 휘파람이 절로 나오던 그때, 가만 보니 그것은 네잎클로버가 아닌 세잎클로버였다. 왜 책 속에 들어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흔하디 흔한 세잎클로버였다.

나는 세잎클로버 잎 가운데 하나를 조심스럽게 둘로 나눴다. 헌책방이 오래 유지되길 소원하며 네잎클로버의 행운을 가장 오래돼 보이는 책 속에 남겨놓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가져왔다.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열세 번째 칼럼입니다. 가을은 모든 것이 짙어지는 계절입니다.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supP9oDDGJ000&pageIndex=1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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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10/04 17:57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제주에서 인도를 만나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서울에서만 살아온 내가 일하던 대학을 그만두고 제주 시골 마을로 내려온 데는 인도 봉사활동 경험이 상당 부분 기여했다. 2020년 1월 출국해 현지 학교(봉사기관)에서 보낸 14일의 짧은 시간은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에는 충분했다.

인도 콜카타에서 180킬로미터 떨어진 산티니케탄 지역 작은 마을. 정규 교육은 고사하고 어릴 때부터 방치되거나 공장에 다니는 아이들, 맨발로 거친 땅을 돌아다니고,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어린 동생을 업고 다니는 작은 영혼들이 숨 쉬고 있었다. 우는 것보다 웃는 얼굴이 더 슬플 때가 있다.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추구해온 성공과 행복의 기준은 무의미해졌다. 그곳에서는 이른바 흙수저인 나도, 미니멀리스트인 나도 너무 많이 가진 사람 축에 속했다.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달았다. 거대한 삶의 모순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핍으로 가득한 인도에서 함께한 이들. 봉사단 이름 <나마슈떼>. 소외된 인도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교육봉사에 참여했던 대학생들을 제주에서 재회했다. 내게는 만남 이상의 만남이었고 감동 그 이상의 감동이었다. 비록 모든 학생들이 제주에 오지는 못했지만 6명의 반가운 얼굴이 나를 인도로 소환했다. 제주에서 인도를 만났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제주에서, 그것도 내 집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연락이 오랫동안 끊기기도 했고, 내가 일을 그만두고 제주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보다는 가깝지만 제주 시골 마을까지 시간을 내서 찾아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사람처럼 영원히 못 볼 수도 있었다.

그저 가끔씩 그 시절이 떠올라서 가슴이 아릴 때가 있었는데,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는 말도 못했는데, 그 끝을 알 수 없는 인도의 비밀처럼 소식이 전해지고 연락이 닿았다. 당시 인솔자로서 또 식사 담당으로 봉사단 학생들의 모든 끼니를 책임졌는데, 이젠 학생들이 맛있는 음식을 잔뜩 싸들고 와서 내 앞에 펼쳤다. 인도의 맛과 제주의 맛이 어우러져 힘들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맛을 만들어냈다.

새벽까지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인도 봉사활동 영상을 같이 보면서는 인도 아이들처럼 웃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우리가 잠시 그곳에 살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무엇보다 감사했던 것은, 학생들이 현지 학교에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인도에서의 기억을 그저 추억으로, 스펙으로 삼지 않고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가는 진심이었다.

나에게 학생들은 영원한 대학생이고 봉사단원이지만 실상은 장교로, 직장인으로, 대학원생으로 성장해 있었다. 어려운 이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멋진 청년들로 성장해 있었다. 인도, 제주, 그 다음은 어디일까?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열두 번째 칼럼입니다. 언젠가 인도에 다시 가게 될 겁니다.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sDNZ20DDGJ000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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