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04 17:57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제주에서 인도를 만나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서울에서만 살아온 내가 일하던 대학을 그만두고 제주 시골 마을로 내려온 데는 인도 봉사활동 경험이 상당 부분 기여했다. 2020년 1월 출국해 현지 학교(봉사기관)에서 보낸 14일의 짧은 시간은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에는 충분했다.

인도 콜카타에서 180킬로미터 떨어진 산티니케탄 지역 작은 마을. 정규 교육은 고사하고 어릴 때부터 방치되거나 공장에 다니는 아이들, 맨발로 거친 땅을 돌아다니고,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어린 동생을 업고 다니는 작은 영혼들이 숨 쉬고 있었다. 우는 것보다 웃는 얼굴이 더 슬플 때가 있다.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추구해온 성공과 행복의 기준은 무의미해졌다. 그곳에서는 이른바 흙수저인 나도, 미니멀리스트인 나도 너무 많이 가진 사람 축에 속했다.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달았다. 거대한 삶의 모순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핍으로 가득한 인도에서 함께한 이들. 봉사단 이름 <나마슈떼>. 소외된 인도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교육봉사에 참여했던 대학생들을 제주에서 재회했다. 내게는 만남 이상의 만남이었고 감동 그 이상의 감동이었다. 비록 모든 학생들이 제주에 오지는 못했지만 6명의 반가운 얼굴이 나를 인도로 소환했다. 제주에서 인도를 만났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제주에서, 그것도 내 집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연락이 오랫동안 끊기기도 했고, 내가 일을 그만두고 제주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인도보다는 가깝지만 제주 시골 마을까지 시간을 내서 찾아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사람처럼 영원히 못 볼 수도 있었다.

그저 가끔씩 그 시절이 떠올라서 가슴이 아릴 때가 있었는데,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는 말도 못했는데, 그 끝을 알 수 없는 인도의 비밀처럼 소식이 전해지고 연락이 닿았다. 당시 인솔자로서 또 식사 담당으로 봉사단 학생들의 모든 끼니를 책임졌는데, 이젠 학생들이 맛있는 음식을 잔뜩 싸들고 와서 내 앞에 펼쳤다. 인도의 맛과 제주의 맛이 어우러져 힘들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맛을 만들어냈다.

새벽까지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인도 봉사활동 영상을 같이 보면서는 인도 아이들처럼 웃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우리가 잠시 그곳에 살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무엇보다 감사했던 것은, 학생들이 현지 학교에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인도에서의 기억을 그저 추억으로, 스펙으로 삼지 않고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가는 진심이었다.

나에게 학생들은 영원한 대학생이고 봉사단원이지만 실상은 장교로, 직장인으로, 대학원생으로 성장해 있었다. 어려운 이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멋진 청년들로 성장해 있었다. 인도, 제주, 그 다음은 어디일까?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열두 번째 칼럼입니다. 언젠가 인도에 다시 가게 될 겁니다.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sDNZ20DDGJ000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891

                                          posted by woogun | 일상다반사 | 관련글(trackback) | 댓글달기



     22/09/08 20:09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가족 여행에서 배운 것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첫 문장으로 꼽힌다. 제주에서 한 명의 여행자로 살고 있는 나는, 다양한 여행자를 만나는 나는 톨스토이의 문장을 이렇게 고쳐 쓴다.

“행복한 가족은 함께 여행을 떠나지만 불행한 가족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여행을 멀리한다.”

제주로 가족 여행을 온 지인들을 그간 여러 번 만났다. 여럿이 같이 다니려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함께 여행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 자체로 행복해 보였다. 특히 여행하는 아이들은 늦은 저녁 학원에서 나오는 아이들과는 얼굴빛이 달랐다. 정해진 틀이나 경계도 없이, 주저하지 않고 바닷가를 달리고 모래밭에서 뒹구는 아이들을 보며 유희의 원형 같은 것을 발견했다. 단순한 기쁨을 포착했다.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물론 한순간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특정한 기준으로 행복한 가족을 규정할 수는 없다. 행복과 불행 역시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가족 여행이 마냥 즐겁고 평탄하게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여행은 익숙한 환경과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누구나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가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지켜야 할 의무와 가족으로서의 책임도 수반된다. 어느 곳 하나 아픈 사람이 발생하면 여행은 고행이 되고, 때때로 사소한 것에도 의견 충돌이 발생한다. 각별한 친구나 연인조차 여행을 가서 틀어지는 경우가 허다한데, 여행의 즐거움 이면에 그만큼의 어려움이 공존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나는 혼자 하는 여행보다 부모님을 모시고 떠난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여행을 즐기는 데도 꽤나 많은 훈련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가족 여행 초창기, 어렵게 시간을 내 강원도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는데, 부모님은 출발하자마자 차가 막힐 것 같다며 집에 가자고 하신다. 휴게소에 들러서는 집에 가서 쉬자며 집에 가자고 하신다.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서는 밥을 다 먹었으니 이제 집에 가자고 하신다. 모처럼 여유 있게 바다를 바라보면서는 경치가 좋으니 그만 집에 가자고 하신다. 집에 무슨 보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집에 가자고 하신다. 이런 증상은 당일치기 여행이 아닌, 제주로 길게 여행을 오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비로소 함께 여행을 즐기게 됐다.

나는 모든 여행자에게 가족 여행은 필수라고 제언한다. 가족 여행 자체가 살아 있는 교육이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과 공감 능력, 유대감, 인내심, 책임감, 순발력, 적응력, 체력, 잘 먹고 잘 노는 능력을 자연스럽게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가장 소중한 자산은, 몰랐던 가족의 모습을 발견한 것에 더해 내가 진짜 어른이 됐다는 자각이었다. 혼자서만 여행을 다니던 내가 오롯이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이었다.

혼자 멋진 풍경을 보거나 맛있는 걸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고 같이 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그 정도 마음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부모님이 가장 젊은 오늘, 아이들이 가장 빛나는 오늘, 함께 떠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열한 번째 칼럼입니다. 가족 여행은 어른이 되는 여행입니다.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rJ1vsMDDGJ000&pageIndex=1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886

                                          posted by woogun | 일상다반사 | 관련글(trackback) | 댓글달기



     22/08/18 11:39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여름에 만난 사람들
1. 제주공항과 인접한 아름다운 해안도로. 제주시 도두동에 있는 무지개해안도로를 걷는다. 한 청년이 무슨 영문인지 나를 반기며 달려오다시피 한다.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그는 거침없이 무언가를 건넨다. 핸드폰이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사진 촬영이 그렇게 들뜬 목소리로 해야 하는 부탁인가 생각하던 찰나, 한 사람을 더 발견한다. 몇 걸음 뒤에서 여자 친구로 추정되는 인물이 옷매무새를 분주히 가다듬고 있다.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기운이 뭔가 불길하다.

이 시간 이후부터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셀카봉과 삼각대이다.
하트! 뽀뽀! 제주 최고!

그들은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커플이 할 수 있는 모든 포즈를 연출한다. 지나친 애정과 풍부한 표현력을 과시한다.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족히 스무 장은 찍어준 것 같다. 그들에게는 그저 멍하니 걷는 내가, 혼자인 내가 사진을 대량으로 찍어줄 적임자로 보인 것이다. 먼 바다를 바라본다. 내가 이러려고 모든 걸 내려놓고 제주에 왔구나. 산전수전 다 겪으며 모진 세월을 견뎌 왔구나. 나를 불타오르게 만드는 건 한여름의 태양만은 아닐 것이다.

2. 무더위와 짜증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시원함. 서귀포시 돈내코유원지 안에 위치한 원앙폭포는 물놀이하기 좋은 계곡이다. 제주에서 이곳보다 시원한 장소는 찾지 못했는데, 마음속 번뇌가 한순간에 오그라들 정도로 물이 차갑다. 나는 발목만 담그고도 득도를 할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있었고, 계곡 한가운데서는 겁 없는 아이처럼 첨벙이던 남자가 있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그였다. 제주 여행에 한창 빠져 있던 시절 종종 들르던 게스트하우스 사장이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그는 10년 넘게 해오던 일을 접고 이제 곧 서울로 올라간다고 했다. 누군가는 서울로 가고, 누군가는 제주로 온다. 누군가는 제주에서 첫 여름을 보내고, 누군가는 마지막 여름을 보낸다. 얼음장 같은 계곡물이 흐르는 원앙폭포에서 여름과 겨울이 교차했다.

3. 아이스크림 하나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여름이 그렇게 괴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제주 동문시장에 자주 들르면서도 그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시장 안쪽 상점에서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닌, 시장 주변 인도를 따라 좌판을 벌여놓고 물건을 파는 할머니들. 주로 채소나 나물, 소소한 것들을 취급하는 네다섯 명의 할머니들이 붕어 모양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환하게 웃는다. 제주 할머니들은 늘 무뚝뚝한 이미지였는데 저렇게 밝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다. 할머니들의 대화에서 웃음꽃이 피어난다. 제주 방언이 상당수 섞여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 행복을 표현하는 언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온다. 뜨겁던 여름이 녹아내린다.

결국 여름의 괴로움은 지나갈 것이고 행복은 찾아올 것이다.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커다란 행복을 기다리기보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작은 행복을 지나치지 않는다면.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열 번째 칼럼입니다. 여름의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qekxrsDDGJ000&pageIndex=1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879

                                          posted by woogun | 일상다반사 | 관련글(trackback) | 댓글달기



    1  2  3  4  5  6  7  8  9 ...   120    
 
        
분류 전체보기
일상다반사
감성코드
호주 이야기
뉴질랜드 이야기
말레이시아 이야기
일본 이야기
추억의 사진·영상
 
 
  Total 560976  Today 33


              ad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