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8/22 22:31
     대리 인생 - 우희덕 숭실대 입학관리팀 과장
2015-08-11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1179097


해 전 방송된 모 통신사 CF에서 남자 주인공은 회사에서는 만년 대리로, 밤에는 대리운전기사로 살아간다. 대리운전 현장에서 그와 우연히 만난 회사 팀장은 “낮에도 대리, 밤에도 대리입니까”라고 운을 떼며, 이제는 두 개의 ‘대리 인생’을 모두 끝내 보자고 격려한다.

이 CF를 보며 ‘내 인생이 저것보다는 낫겠지’ 하며 안도한다든지, ‘그래,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 길이 열리겠지’라고 ‘대리 위안’과 ‘대리 실현’의 감정을 느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리 인생’은 특정 직업이나 계층, 경제적인 관점에서 파생되는 전유물이 아니다.

국정을 책임지는 위정자들(빈번하게 뻔뻔하게 국민의 대리자임을 부정하지만)부터, 기업인이나 변호사, 유명 스타도 ‘대리 인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파트단지를 꿀단지 보듯, 자본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이 뚱딴지 같은 사회에서, 단지 ‘내 일’을 위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행여나 ‘내가 대리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보지도 않았다면, ‘만년 대리’로서의 편입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거대담론을 떠나 일상의 소소한 것들도 ‘대리 인생’으로 점철돼 있다. 보여주기식 SNS부터 매스미디어의 연애, 가상결혼, 육아, 요리 프로그램 등은 사람들의 삶을 대신 살아주며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정제된 화면과 선별된 감정 속에 어떠한 사유나 고민의 부피도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시각화된 이상’에의 종속은 인생의 비대칭화를 가속화한다.

표면적인 ‘대리 인생’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 안의 내용은 전혀 다를 수 있다. ‘대리 만족’, ‘대리 체험’, ‘대리 관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타인의 삶을 잉태한 ‘대리모’로 살 뿐이다. ‘대리 인생’은 자신을 겉돌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남의 틀과 기준에 자신의 인생을 꿰맞출 때 심화한다. 반대해야 한다. 반대로 해야 한다. 내 자신의 주인이 되어 그 틀을 깨야 한다. 남은 남겨 두고, 나를 나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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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8/22 22:28
     ‘쿨하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 우희덕 숭실대 입학관리팀 과장
2014-09-03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978341


이 부러워하는 직장. 명품 옷에 외제차. 술값을 아끼지 않고, 미녀들에 둘러싸여 인생을 즐기는 C씨는 쿨한 인생의 표상이다. 그런 그가 행여나 대리운전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만취했지만, 많이 안 취했다”고 큰소리치며 음주운전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이내, 평소 ‘조류’로 폄하하던 경찰의 음주단속에 걸리고 만다. 술마실 때는 열광했던 외침, "더더더더." 경찰의 독려에도 그는 웬일인지 급격한 심폐기능의 이상을 보이며 소심한 바람을 내뿜고 만다.

언제부턴가 이 사회에는 ‘쿨하다’는 것이 등장했고, 권장되고 포장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가? ‘썸’타는 이성과 쇼핑할 때는 할인카드를 내지 않는 것, 이별에 대한 예의도 없이 사람을 ‘오버랩’해서 만나는 것 따위가 쿨한 것일까?

시중에서 유통되는 ‘쿨하다’는 의미는 쉽게 말해, 어느 상황에서도 ‘모양이 빠지지 않는 것’이다. 또 ‘어떤 일에도 마음을 깊이 두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설정한’ 내가, 언제나 그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척’이 아니라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기 분야에서 독보적이며, 선망의 대상이어야 한다. 남을 의존하고 추종하는 사람이 ‘쿨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는 재벌이나 유명 스타 정도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을 쿨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재벌들에게 휠체어는 이미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되어버렸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연예계·스포츠 스타들은 구질구질, 구구절절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은 비겁하게 살아간다. 수많은 사회문제와 모순 속에 ‘쿨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냉소적 자위일 뿐이다. 쿨한 것은 오히려 쿨하지 않은 것에 있다. 있는 그대로 잘못을 고백할 줄 아는 것. 남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자신을 낮추고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는 것 말이다. 교황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너무 쿨한 척 하며 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사람을 살게 하는 건 따뜻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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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8/22 22:26
     과잉노출의 노출과잉 - 우희덕 숭실대 입학관리팀 계장
2013-12-18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839478


리는 노출되어 있다. 노출된 몸에 노출되어 있다. 매스미디어나 SNS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벗은 몸에 경도되고 있다. 특히 주요 일간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인터넷 언론에서는 ‘헐벗고 굶주린’ 여성들이 남심을 집어삼키고 있다. 일부 사이트에서는 선정적 광고가 기사보다 화면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기이한 창조경제(?)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다.

안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선택과 호오(好惡)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이고 강제적인 상황이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한 피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국회도, 마을회관도 광대역 LTE 환경이다. 예전에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이미지들을, 이제는 의도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사람들은 시나브로 알몸에 알이 배겼다.

‘합법적 성희롱’도 남발되고 있다. 어느 순간, 이 사회에서는 여배우와 걸그룹, 치어리더 등의 노출이 1면을 장식하는 이슈가 돼 버렸다. 소심한 성격에 심장이 약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자들은 ‘충격’ ‘경악’ ‘아찔’ ‘파격’ ‘흥분’ 등의 어휘로 몸매를 평가하며 그들에게 성적인 폭력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기사는 대개 이해당사자 간 암묵적 합의가 된 것이며, 그 2차적인 폭력은 수용자에게 전도된다는 데 있다.

노출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다.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이 몸에 한정되어 있고, 주로 여성에게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세상의 모든 여성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이 굳이 벗은 여성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남성 중심의 자본주의, 미디어에서 여성의 노출은 빠르게 소비되는 기성품으로 전락한다.

뒤집어 봐야 한다. 벗겨진 알몸에 숨겨진 자본주의의 옷, 주체적 여성의 객체적 대상화 문제를 말이다. 많은 이들이 성범죄 기사에는 공분하지만, 정작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무분별한 노출에는 관대한 현실. 히잡으로 잡힐 문제가 아니라면, 노출에도 ‘민주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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