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28 14:10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제주의 여름과 여름의 나
땅이 녹아내린다. 땀이 흘러내린다. 몸이 늘어진다. 끈적인다 몸이. 태양이 작열한다. 여름이 방학을 끝냈다. 폭염주의보가 발효되었으니 야외 활동을 자제해 달라는 방송이 마을에 울려 퍼진다. 잠시만 피부가 햇빛에 노출돼도 피부과 레이저처럼 따갑다.

제주의 여름은 중년인 나를 20대 시절로 되돌려놓았다. 뜨겁던 그때로 나를 인도했다. 한 가지 일에 도전했다. 그건 제주에서 불가능하다는 옆집 아저씨의 말에 자극받아 끝까지 견뎌보기로 했다. 여름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유토피아는 없다는 생각을 줄곧 견지하고 있다.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이없게도 에어컨이 펑펑 나오는 읍내 마트에서 처음 했다.

7월 초까지 에어컨을 틀지 않고 버텼다. 에어컨이 없었을 땐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었다. 집에서든 차에서든 틀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포기했다. 한낮의 열기와 계속되는 열대야. 숨이 턱턱 막혔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진이 빠졌다. 제주 특유의 높은 습도가 체감 온도를 끌어올렸다. 샤워를 해도 그때뿐이었다. 바보 같았지만 의미 없는 도전은 아니었다. 그새 몸무게가 4킬로그램이 빠졌다. 20대 때의 몸무게로 회귀했다. 제주의 여름은 아무것도 없지만 무엇이든 도전했던 그때의 여름과 닮았다.

여전히 에어컨 가동은 자제한다. 대신 자연에서 더위를 식힐 방법을 찾는다. 이렇게 뜨거운 여름을 안겨준 제주는 사실 대한민국 최고의 피서지가 아니던가? 언제까지 낙원에만, 아니 읍내 마트에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해변으로 향한다. 제주에서도 손꼽히는 금능, 협재해수욕장이 아닌 작은 해변으로 향한다. 인파로 북적이지 않는 곳으로 간다.

표선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평일에도 사람들이 많다. 예상했다. 사막 같은 해안사구와 현무암 지대를 건너 옆에 있는 해변으로 간다. 어떤 비밀한 경계를 건너간다. 이내 내 앞에 펼쳐지는 건 소금막해변. 유명한 해수욕장 옆인데 이상하리만치 사람들이 드문드문하다. 한적하다. 그 규모도 작고 물빛이든 백사장이든 특별한 것은 없으나 부족한 것 또한 찾을 수 없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기분은 좋으면 받아들이고, 싫으면 기분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가만히 해변을 바라본다. 서프보드를 들고 있는 사람, 개와 산책하는 사람, 파라솔 아래 낮잠을 자는 사람, 그렇게 해변과 하나가 된 사람들을 바라본다. 잔잔한 파도가 나를 부른다. 아직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지 않은 모래밭을 달려 바다로 뛰어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넘어질 거라는 것을. 소금막해변은 마치 내가 해변을 소유한 것처럼,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유유히 평화롭게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잠시 잊고 있었다. 해변에는 그늘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여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는 걸. 산이든 강이든 바다든 그 어디든. 지금 소금막해변의 사람들처럼.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아홉 번째 칼럼입니다. 아직 여름입니다. 그것도 한여름.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pzRAGADDGJ000&pageIndex=1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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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7/11 16:01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동물과 공존한다는 것
반려동물을 키우기 적합한 환경에 살고 있다. 잔디 마당이 딸린 제주 시골집에 혼자 산다고 상상해보면, 으레 개나 고양이가 등장하는 그런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이웃 주민이 얼마 없어 적막하기까지 한 시골 동네. 대문도 없고 집 둘레는 낮은 돌담으로 되어 있어 사실상 사방이 트여 있는 집. 사람이 소유한 집이라기보다는 자연을 잠시 빌려 쓰는 쪽에 가깝다. 동물들의 왕래도 잦다. 때로는 집을 점유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매일 집 주변을 살피는 내가, 공포 영화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내가 심장이 멎을 뻔한 일이 있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간, 거실에 앉아 있는 나를 누군가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누군가 나를 쳐다본다는 확신이 들어 주방 쪽 창문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돌담 위에 올라선 검은 고양이가 노란색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집에 등장하는 동물은 길고양이가 대표적이다. 제주 중산간 지역에는 들개도 출몰한다고 하고, 들쥐와 뱀이 나온다고 고백하는 집주인도 있다. 참새와 멧비둘기, 까치, 꿩, 매, 그밖에 이름 모를 새들은 나를 철새 도래지로 소환하며 수시로 날아든다. 언제쯤 노루와 고라니, 멧돼지가 집 앞에 나타날지도 알 수 없다.

동물들이 무섭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왜 동물들이 사람들이 사는 집 주변에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이유야 복합적이겠지만 핵심은 무분별한 난개발로 서식지를 잃어버렸거나 쓸모없는 물건처럼 유기되어 갈 곳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결국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동물들을 쫓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

다시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면,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기 적합한 환경에 살고 있지만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다. 동물을 사랑하기에 동물을 키우지 않는다. 생명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내가 동물과 공존하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집고양이든 길고양이든 주기적으로 밥을 준다는 것은, 동물을 길들인다는 것은, 그 행위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발생한다는 걸 의미한다. 내가 외롭다고, 동물이 귀엽다고 혹은 불쌍하다고 가볍게 접근할 일은 아니다.

물론 동물을 사랑하는 저마다의 방식이 존재한다. 특히 버려진 동물들을 돌보는 것은 숭고한 일이다. 그런 마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다만 개인의 선의에 기대는 것은 한계가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크게는 난개발, 공장식 축산부터 줄여야 하고, 동물들을 쉽게 판매하거나 키우게 해서도 안 된다. 동물을 유기하거나 학대하는 이들을 엄중하게 처벌하고, 사람과 동물이 공존할 수 있는 적정 개체수 유지를 위해 중성화 수술 등도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역설적으로 절대적인 동물의 숫자는 줄어들 수 있다. 동물과의 공존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한다면, 그 다음은 자연이 알아서 할 것이다.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여덟 번째 칼럼입니다. 생명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pHsWSkDDGJ000&pageInde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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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06/22 11:27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어떤 하루
커튼을 젖히자 투명한 빛이 창 안으로 스며든다. 빛이 공간을 채우면 온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이 깃든다. 마음이 열린다. 맑고 포근한 날의 제주와 비가 오고 흐린 날의 제주는 서로 다른 곳이다. 다른 장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두말 할 것 없이 전자다. 그것은 컬러 사진과 흑백 사진, 푸른 바다와 검은 바다, 제주 해물라면과 그냥 라면 이상의 차이다. 제주에서 일주일 내내 흐리거나 비오는 날씨를 경험하면, 그런 환경에 혼자 있다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다만 삶을 노래하기보다 비관하기 쉽다. 줄곧 흐리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하루 종일 맑은 날은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

그런 날은 특별하다. 실상 어제와 똑같은 하루일 뿐인데 특별한 하루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집에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날.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일단 어디든 밖으로 나가야 하는 그런 날이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마주하는 곳이 제주라면, 내 앞에 펼쳐지는 곳이 모두 제주라면 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계획 없이 나왔다고 해서 후회할 일은 없다. 조금 헤맬 뿐이다. 일단 떠나는 게 더 중요하다. 힘든 여행은 있어도 후회하는 여행은 없다. 미션을 수행하듯 많은 곳을 돌아다녀야 할 이유도 없다. 여행은 경쟁이 아니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천천히, 꾸준히 쌓아가는 여행의 마일리지는 소멸하지 않는다. 멀리 떠나거나 관광지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 관광지가 아니어도 여행할 곳은 많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마을을 둘러보는 것도 하나의 여행이 된다. 어느새 나는 한경면 고산리 마을을 걷는다. 단층 위주의 아기자기한 집들과 상점, 식당이 정겹다. 번잡하지 않고 평화롭다. 학교 앞 떡볶이를 재현했다는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고, 사인볼(회전간판)이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른다. 볕 좋은 날 포구에 줄줄이 널어놓은 오징어도 몇 마리 산다.

그저 지나가는 길이라고 여기며 지나쳤을 때는 느끼지 못했다. 이곳이 이런 곳이었는지, 이런 풍경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특히 자구내입구 사거리에서 자구내포구로 이어지는 노을해안로. 환상적인 꽃길을 자랑하는 녹산로나 중산간 지역을 시원하게 관통하는 산록남로보다 나은 건 그 이름뿐일지도 모른다. 수월봉 지질트레일이나 당산봉, 차귀도를 가기 위한 관문 정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을해안로 주변에 펼쳐지는 탁 트인 평야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개방감을 선사한다. 끝없이 밭이 넓어 더없이 하늘이 높다. 맑은 날 빛을 발한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질료들이 특별한 풍경을 만든다. 그 풍경이 아무것도 아닌 여행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 여행이 아무것도 아닌 하루를 특별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에 어떤 하루를 건넨다.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일곱 번째 칼럼입니다. 제주에서 날씨는 정말 중요합니다.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ocxX64DDGJ000&pageIndex=2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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