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8/22 22:16
     소셜 네트워크의 종말 - 우희덕 숭실대 홍보팀 계장
2013-04-05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714099


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는 온라인에서 사람들의 관계를 형성해주는 매체다. 명목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은 ‘소식 배달 서비스’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가 과거의 그것과 대비되는 점은, 상대방의 페이지를 일일이 찾지 않아도 그들이 올린 내용을 볼 수 있고, 자신의 소식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비스에 과도한 ‘서비스’가 추가되고 있다. 군만두 서비스와는 다르다. 구독하는 신문에 광고 전단지가 우후죽순 늘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매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초창기에는 볼 수 없었던 상업적인 게시물이 많이 눈에 띤다. 일종의 계획적인 ‘배달 사고’다. 표면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소통을 표방하지만, 기업이나 개인의 마케팅 도시락이 내 집 앞에 쌓이고 있다.

‘수평적 관계’도 기울고 있다. 세계의 어떤 사람과도 1:1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은 대안적 미디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러나 실상 SNS는 하향식(top-down)으로 유명인(기업)이나 기존 미디어의 컨텐츠를 재생산하는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팔로워 수는 권력이 된지 오래다. 소소한 자신의 일상을 나누기 보다는, 단순 공유(리트윗)와 ‘좋아요’ 품앗이에 그 기능이 한정되고 있다.

SNS는 묘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매체의 성공 원인이 아이러니하게도 실패의 이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상업성(흥미), 개방성, 확장성, 접근성, 공유성, 항시성, 즉시성 등은 달리 말해 사생활 침해, 피로감과 압박감, 지인관계 설정(차단), 중독 문제 등 위기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종말의 경고는 부활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싸이월드는 저물었지만, ‘싸이 월드’가 온 것처럼 시대는 바뀐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의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SNS의 본질과 존재 이유를 생각한다면, 이용자들을 객체화하는 수익모델은 곤란하다. 물론 이용자들의 주체적인 이용의식도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뉴미디어가 순간 올드미디어로 바뀌는 세상. 사람 중심의 미디어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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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8/22 22:14
     스마트폰 없는 세상 - 우희덕 숭실대 홍보팀 계장
2013-03-05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699142


마트폰 없는 세상은 어떨까. 비틀즈의 ‘Imagine’ 선율에 맞춰 그런 세상을 상상해본다. 쉽지 않다. 이과수 폭포처럼 쏟아지는 통신사 광고와 신제품 폭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손끝의 세계. ‘바보 상자’와는 달리 비판하기 힘든 이름을 가진 태생적 신분은 가히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다.

불과 십수 년 사이, 스마트폰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은 초코파이와 와이파이의 관계만큼 뒤바뀌었다. 상상하기 힘들어졌다. 세계 스마트폰 사용자 10억명 시대. 스마트폰이 세상을 ‘접수’했다. 스마트폰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 가족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비교한 최근의 사진을 보면 납득이 간다. 그렇다면 세상은 과연 그 이름에 걸맞게 스마트해졌는가.

스마트폰에는 ‘스마트’가 없다. 붕어빵만 그런 식인 줄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사용하는 것은 어렵다.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각자 스마트폰만 만진다거나, 늦은 밤에도 아랑곳없이 게임 초청 메시지를 날린다거나, 하루에도 수십 차례 SNS에 들락날락하는 일은 흔하다. 그저 도구이고 수단일 뿐인 스마트폰이 이제는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목적 자체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불안과 종속을 야기한다. 기기 손상과 분실 걱정, 배터리 잔량과 데이터 사용에 대한 조바심, 연결에의 압박과 습관적 사용, 업그레이드 갈망 등 최첨단 디지털 기기가 만들어내는 아날로그적 불안이 산업을 형성하고, 비용 지불로 이를 해소하라고 강요한다. 마치 동물원에 갇힌 동물처럼 ‘정형행동’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보며, 스마트폰이 그들을 가지고 논다고 느끼는 것은 무리일까.

스마트폰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디지털 바보’, ‘아날로그 똑똑이’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 머물거나, 파발이나 봉화로 소통하던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사람의 문제고 주체의 문제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편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없어도 자신의 삶이 흔들리지 않아야 비로소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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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8/22 22:10
     멘토의 과잉, 생각의 빈곤 - 우희덕 숭실대 홍보팀 계장
2012-11-01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648956


토들이 넘쳐난다. ‘88만원 세대’, ‘반값 등록금’, ‘취업 대란’ 등의 키워드를 탄생시킨 시대의 불안을 반영하듯 종교계, 학계, 정계, 문화계에 많은 이들이 자천타천 멘토로 활동하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멘토서(書)가 유행처럼 번지고, 지상파에서는 강연 형식의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다. 또 대학가에서는 토크콘서트 방식의 멘토 담론이 유력 대선 후보의 등장으로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멘토의 과잉은 아이러니하게도 생각의 빈곤을 낳는다. 골치 아픈 생각은 하기 싫은 현실은 이해한다고 해도 자신이 해야만 하는 사유의 과정을, 멘토들의 경험을 근거로 한 정답식 조언 속에서 빠르게 얻어내려 하는 것은 문제다. 막연히 부여된 가능성으로 반전의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자기합리화식 위안’은 덤이다. 무(無)덤이다. 멘토서(書)가 인기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독서 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고전이나 학술도서는 외면받는 ‘불편한 진실’이 과잉 속에 담긴 빈곤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SNS 매체에서도 나타난다. 트위터나 블로그 등의 개인 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음에도 생각의 다양성은 확보되지 않고 있다. 유명 멘토들의 생각을 그대로 옮기고, 이에 대한 짧은 ‘감상’에 머문다. 멘토를 ‘생각의 상위계급’으로 놓는 종속적 프레임이다. 멘토를 위시한 편가르기식 의견 개진과 감정적 소모전도 아쉬운 대목이다. 주장은 강해졌지만 근거는 빈약하고, 스펙은 화려하지만 본질은 초라해 보인다.

‘멘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멘토는 무엇을 대신 해주는 사람이 아닌, 할 수 있도록 돕는 조언자다. 그런 의미에서 개별 수용자의 상황을 모두 고려할 수 없는 멘토에 대한 맹종은 위험하다. 또한 멘토의 지혜가 아닌 가시적 성공만을 동경하는 것은 ‘생각의 공회전’을 일으킨다. 멘토의 직접 경험을 간접경험, 혹은 그 이상의 의미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생각의 힘이다. 모든 사유의 자유가 자신에게 있듯, 멘토를 ‘멘토’로 만드는 것도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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