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8/22 22:25
     고통과 함께하기 - 우희덕 숭실대 입학관리팀 계장
2013-10-24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809988


No pain, no gain’.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이 영어 속담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인용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고통은 덜 받으면서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격언은 사실 굉장히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고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다. 크게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 자신의 일, 의식주와 관련된 물질적·물리적 고통이 모든 일에 수반된다. 큰 병에 걸려 아파하는 것, 꿈을 이루지 못해 좌절하는 것, 사람 사이의 관계 갈등도 모두 크고 작은 고통의 단면이다. 자신의 삶과 행복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 고통은 더 커진다.

고통은 극복의 대상이지만 삭제할 수 없다. 아픈 몸과 마음은 서로를 도려낼 수 없는 함수관계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고통의 일면을 극복하거나 이겨냈다고 믿을 뿐,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큰 고통이 해결되면, 별일 아닌 것으로만 느껴졌던 작은 일들이 새로운 고통으로 다가온다. 끝나지 않는 어둠 속의 두더지 게임이다. 고통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지향점보다 한 발 앞서 있다.

고통의 극복은 그것을 피할 때가 아니라 받아들일 때 시작된다. ‘잘 사는 것’은 어떤 대단한 것을 성취한다는 개념에 앞서, 다가오는 고통들을 어떻게 잘 받아내느냐의 문제이다. 고통을 환락 속에서 회피하거나, 극기와 더 큰 고통으로 잊어보려는 것. 또는 개인적인 차원의 깨달음, 일종의 ‘정신승리’를 하는 것과, 사회 커뮤니티나 종교적인 차원에서 풀어보려는 것 등 그 수용 태도가 극복 방향을 결정한다.

고통은 삶과 함께한다. 그래서 그 극복 방법도 ‘함께’하는 것에서 나온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관심과 배려를 받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한 사람을 모두가 외면하는 사회에서 고통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무조건 ‘특정 종교를 믿어라’, ‘이런 방법을 쓰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다. 그 무엇보다 먼저, 서로의 고통을 함께할 수 있을 때, 고통은 ‘또 다른 나’를 선물할 것이다.

                                          posted by woogun | 일상다반사 | 관련글(trackback) | 댓글달기



     15/08/22 22:22
     나 혼자 산다는 것 - 우희덕 숭실대 입학관리팀 계장
2013-09-05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787455


금 대한민국은 사바나 초원이다. 지구 온난화나 그에 따른 전력난 때문이 아니다. 부쩍 도심에 자주 출현하는 멧돼지처럼, 서울대공원에서 일제히 동물들이 탈출했기 때문도 아니다. 넘쳐나는 ‘초식남’ 때문이다. 연애나 결혼 따윈 관심 없는, 건조한 사회에 최적화된 신종 인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런 경향을 반영하듯 MBC의 ‘나 혼자 산다’가 인기다. 결핍으로 점철된 노총각 시청자에게 이 프로그램은 도발적으로 다가온다. 일단, 여자가 없다. 군대나 축구 따위가 아닌 이상, 혼자 사는 남자들만 우르르 나오는 현실을 납득하기란 쉽지 않다. 재미도 없다. 만들어진 일상은 부자연스럽다. 무엇보다 배려가 없다. ‘불금’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보고 자위하라는 것은 가혹하다.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독한 외로움, 지저분한 집안, 지루한 식사 등은 혼자 산다면 ‘너는 내 운명’이다. 또 새로운 일상과 만남을 원하지만 결국 혼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 하지만 방송은 방송일 뿐, 현실은 ‘무지개 저 넘어’에 있다. 대중적 인기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연예인들이 만들어내는 혼자의 삶은, 실제의 그것과는 다른 자발적 소외와 가상현실일 뿐이다.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은 양면적이다. 무엇보다, 경제력이 충분한 경우와 반대의 상황이 존재한다. 하지만 어느 경우라도 ‘남녀는 평등하지만, 집은 남자가 해야지’라는 사회통합의 분위기에 쉽게 편입되지는 않는다. ‘나 혼자 산다’는 주체성의 이면에는 더 이상 부딪히지도, 상처받지도 않겠다는 거세된 자발성과 수동성이 깔려 있다.

‘초식남’ 현상은 그 본질을 증명하지 않는다. 단순히 연애나 결혼 거부의 문제가 아니다. 부족함을 용인 않는 남녀관계의 비대칭성과 자기욕망을 말한다. 혼자 사는 것이 ‘초식남’이라는 허울 아래 이성 배제로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본질을 충만함이 아닌 결핍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바나와 같은 도피처는 이 사회에 없다.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사랑할 수 없다.

                                          posted by woogun | 일상다반사 | 관련글(trackback) | 댓글달기



     15/08/22 22:20
     ‘슈퍼맨’이었던 기자 - 우희덕 숭실대 홍보팀 계장
2013-06-11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745661


퍼맨’은 더 이상 기자가 아니다. 최근 슈퍼맨 시리즈의 후속작인‘맨 오브 스틸’에서 그는 몇 십년간 유지한 직업을 버렸다. 정확히 얘기하면 주인공이 직업을 갖기 전의 얘기지만, 감독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영웅으로서 그를 기자로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빨간 팬티를 벗어던진 슈퍼맨의 옷차림처럼 변해버린 언론을 보면 말이다.

이 사회는 ‘슈퍼맨’을 꿈꿔온 기자들을 통해 자본과 권력을 견제하고, 약자들을 보호해왔다. 국민들의 인권이 신장되고, 알권리가 보장되고, 사회악이 사장된 데에는 그들의 역할이 컸다. 이처럼 언론의 공익성을 인정하기에 대다수의 공공기관과 기업에는 기자들이 출입한다. 형태상 사적 집단에게 사회 전반을 감시하는 특별한 권한과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기자도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있다. 기사보다 광고영업에 관심이 더 많은 ‘광고업자’,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 만점인 ‘복사업자’, 제목 낚시에 열을 올리는 ‘수산업 종사자’로의 변신 말이다. 소속 언론과 사익을 위해 기사를 파는 ‘슈퍼마켓맨’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더 혼란스러워진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일베’의 최대 수혜자가 언론인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그곳에서 죽치고 있으면 논란거리는 3분 요리다. 그러나 그것은 ‘죽’밖에 안 된다. 기자는 사회정의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기사로 만든 ‘밥’을 주어야 한다. 문제의 본질과 해결책은 외면한 채 사회의 오물로 ‘일용할 양식’을 지어서는 안 된다. 시류에 편승한 가십성 기사에 ‘단독’이라는 말머리를 서슴지 않는 것은 ‘독’일 뿐이다.

기자의 권리와 권력은 공익성을 담보로 주어진 것이다. 공익성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일 때 유지된다. 또 표면적 사실이 아닌, 실체적 진실을 파헤칠 때만 보석처럼 얻어진다. 기자가 그 힘을 사적으로 쓸 때 언론은 슈퍼가 되고, 기사는 사기가 된다. ‘민주화’의 뜻이 전복되고 기자의 권위가 지렁이된 세상. 초능력이 아닌, 가장 평범하고 상식적인 능력을 가진 ‘슈퍼맨’이 필요하다.

                                          posted by woogun | 일상다반사 | 관련글(trackback) | 댓글달기



    1 ...   3  4  5  6  7  8  9  10  11 ...   108    
 
        
분류 전체보기
일상다반사
감성코드
호주 이야기
뉴질랜드 이야기
말레이시아 이야기
일본 이야기
추억의 사진·영상
 
 
  Total 384828  Today 87


              ad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