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8/22 22:28
     ‘쿨하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 우희덕 숭실대 입학관리팀 과장
2014-09-03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978341


이 부러워하는 직장. 명품 옷에 외제차. 술값을 아끼지 않고, 미녀들에 둘러싸여 인생을 즐기는 C씨는 쿨한 인생의 표상이다. 그런 그가 행여나 대리운전비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만취했지만, 많이 안 취했다”고 큰소리치며 음주운전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이내, 평소 ‘조류’로 폄하하던 경찰의 음주단속에 걸리고 만다. 술마실 때는 열광했던 외침, "더더더더." 경찰의 독려에도 그는 웬일인지 급격한 심폐기능의 이상을 보이며 소심한 바람을 내뿜고 만다.

언제부턴가 이 사회에는 ‘쿨하다’는 것이 등장했고, 권장되고 포장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가? ‘썸’타는 이성과 쇼핑할 때는 할인카드를 내지 않는 것, 이별에 대한 예의도 없이 사람을 ‘오버랩’해서 만나는 것 따위가 쿨한 것일까?

시중에서 유통되는 ‘쿨하다’는 의미는 쉽게 말해, 어느 상황에서도 ‘모양이 빠지지 않는 것’이다. 또 ‘어떤 일에도 마음을 깊이 두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설정한’ 내가, 언제나 그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척’이 아니라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기 분야에서 독보적이며, 선망의 대상이어야 한다. 남을 의존하고 추종하는 사람이 ‘쿨한’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는 재벌이나 유명 스타 정도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을 쿨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재벌들에게 휠체어는 이미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되어버렸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연예계·스포츠 스타들은 구질구질, 구구절절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은 비겁하게 살아간다. 수많은 사회문제와 모순 속에 ‘쿨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냉소적 자위일 뿐이다. 쿨한 것은 오히려 쿨하지 않은 것에 있다. 있는 그대로 잘못을 고백할 줄 아는 것. 남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자신을 낮추고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는 것 말이다. 교황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너무 쿨한 척 하며 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사람을 살게 하는 건 따뜻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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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8/22 22:26
     과잉노출의 노출과잉 - 우희덕 숭실대 입학관리팀 계장
2013-12-18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839478


리는 노출되어 있다. 노출된 몸에 노출되어 있다. 매스미디어나 SNS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벗은 몸에 경도되고 있다. 특히 주요 일간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인터넷 언론에서는 ‘헐벗고 굶주린’ 여성들이 남심을 집어삼키고 있다. 일부 사이트에서는 선정적 광고가 기사보다 화면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기이한 창조경제(?)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다.

안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선택과 호오(好惡)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이고 강제적인 상황이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한 피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국회도, 마을회관도 광대역 LTE 환경이다. 예전에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이미지들을, 이제는 의도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사람들은 시나브로 알몸에 알이 배겼다.

‘합법적 성희롱’도 남발되고 있다. 어느 순간, 이 사회에서는 여배우와 걸그룹, 치어리더 등의 노출이 1면을 장식하는 이슈가 돼 버렸다. 소심한 성격에 심장이 약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자들은 ‘충격’ ‘경악’ ‘아찔’ ‘파격’ ‘흥분’ 등의 어휘로 몸매를 평가하며 그들에게 성적인 폭력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기사는 대개 이해당사자 간 암묵적 합의가 된 것이며, 그 2차적인 폭력은 수용자에게 전도된다는 데 있다.

노출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다.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이 몸에 한정되어 있고, 주로 여성에게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세상의 모든 여성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이 굳이 벗은 여성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남성 중심의 자본주의, 미디어에서 여성의 노출은 빠르게 소비되는 기성품으로 전락한다.

뒤집어 봐야 한다. 벗겨진 알몸에 숨겨진 자본주의의 옷, 주체적 여성의 객체적 대상화 문제를 말이다. 많은 이들이 성범죄 기사에는 공분하지만, 정작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무분별한 노출에는 관대한 현실. 히잡으로 잡힐 문제가 아니라면, 노출에도 ‘민주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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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8/22 22:25
     고통과 함께하기 - 우희덕 숭실대 입학관리팀 계장
2013-10-24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809988


No pain, no gain’.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이 영어 속담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인용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고통은 덜 받으면서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격언은 사실 굉장히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고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다. 크게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 자신의 일, 의식주와 관련된 물질적·물리적 고통이 모든 일에 수반된다. 큰 병에 걸려 아파하는 것, 꿈을 이루지 못해 좌절하는 것, 사람 사이의 관계 갈등도 모두 크고 작은 고통의 단면이다. 자신의 삶과 행복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 고통은 더 커진다.

고통은 극복의 대상이지만 삭제할 수 없다. 아픈 몸과 마음은 서로를 도려낼 수 없는 함수관계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고통의 일면을 극복하거나 이겨냈다고 믿을 뿐,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큰 고통이 해결되면, 별일 아닌 것으로만 느껴졌던 작은 일들이 새로운 고통으로 다가온다. 끝나지 않는 어둠 속의 두더지 게임이다. 고통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지향점보다 한 발 앞서 있다.

고통의 극복은 그것을 피할 때가 아니라 받아들일 때 시작된다. ‘잘 사는 것’은 어떤 대단한 것을 성취한다는 개념에 앞서, 다가오는 고통들을 어떻게 잘 받아내느냐의 문제이다. 고통을 환락 속에서 회피하거나, 극기와 더 큰 고통으로 잊어보려는 것. 또는 개인적인 차원의 깨달음, 일종의 ‘정신승리’를 하는 것과, 사회 커뮤니티나 종교적인 차원에서 풀어보려는 것 등 그 수용 태도가 극복 방향을 결정한다.

고통은 삶과 함께한다. 그래서 그 극복 방법도 ‘함께’하는 것에서 나온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관심과 배려를 받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한 사람을 모두가 외면하는 사회에서 고통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무조건 ‘특정 종교를 믿어라’, ‘이런 방법을 쓰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다. 그 무엇보다 먼저, 서로의 고통을 함께할 수 있을 때, 고통은 ‘또 다른 나’를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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