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8 10:42
     코미디 소설가 우희덕의 장편소설 <캐스팅>에 숨겨진 의미


문학에 정답은 없습니다. 창작이든 해석의 영억이든 수많은 가능성만이 존재하죠. 하지만 어떤 작품이든 작가의 의도와 매설해 놓은 상징은 존재합니다. 독자가 이를 간파하고 공감해 줄 때, 나아가 글쓴이조차 감지하지 못한 깊은 이해와 재발견이 탄생할 때, 그보다 기쁜 순간도 드물 겁니다.

아래는 제 두 번째 장편소설 <캐스팅>에 숨겨진 의미입니다. 독서 전이나 후에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문학에 정답이 없긴 하지만요.

삶이 당신을 캐스팅한다
캐스팅은 다의적 의미를 내포한다. 이야기의 줄기인 팟캐스트 방송과 방송을 위한 섭외 작업, 또 무엇을 던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무엇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운명의 부속물이 되기보다 자신을 던져 자신의 삶을 찾는 것이 캐스팅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가장 뜨거웠던 여름에 만난 사람들
낡은 뉴욕 양키스 모자를 쓴 남자가 뒤를 돌아본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벌어진 일들과 마주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정체불명의 노인, 도시에서 사라진 맛을 간직한 국숫집 아주머니,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인력사무소 소장, 대중의 시야에서 이탈한 톱스타,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이들, 그리고 한 사람. 여름이라는 계절이 만물을 성장시키듯 여름에 만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과 형태로 남자가 성장하는 데 관여한다. 자기 삶을 찾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방송사 탐사보도 피디
남자는 이름처럼 모진 수모를 겪으며 살아간다. 지상파 방송사 피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다고 알려진 탐사보도 프로그램 피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다는 조연출로 일한다. 뉴스 아이템 선정, 현장 잠입취재, 영상편집, 기타 잡다한 업무들까지 모두 그의 몫이다. 남자는 일에 전력을 다하지만 소위 엘리트인 회사 선배들은 그의 변변치 않은 이력과 불안하고 불온한 눈빛이 못마땅하다. 일 떠넘기기와 반목이 끊이지 않는다.
남자는 월급 받는 직장인과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인 사이에서, 끝없는 자기 부정과 자기모순 속에 살아간다.
고통 속에서도 일을 놓지 못한다.

급조된 유령 부서에서 팟캐스트 제작
탐사보도 피디는 그러나 이미 지난 과거일 뿐이다. 남자는 일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실수를 저지르고, 징계 누적으로 업무에서 배제된다. 뉴미디어개발팀이라는 실체가 없는 부서에 배정된 그는, 창고로 쓰이는 스튜디오에 격리된다. 그곳에서 징계 전력이 가장 많고, 독립성과 개성이 가장 강한 피디를 만난다. 달리 말해 동료들도 포기한 피디 선배와 일하게 된다. 경력과 무관하게 간부들로부터 오디오 팟캐스트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상황. 방송 정상화, 부적격 방송 인력 퇴출이라는 구호와 맞물려 피디 두 사람과 그들을 내보내려는 간부들의 생존 게임이 시작된다. 부조리극 무대 같은 열악한 제작 환경을 뒤로하고 남자는 팟캐스트 제작진과 출연자를 구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캐스팅이 그의 일이 된다.

여름잠
사람을 극한으로 내모는 여름의 온도와 엄혹한 현실에 잠시 숨을 곳이 필요하다. 한여름 떠돌이 개가 길을 헤매다가 나무 그늘 아래, 바람이 잠시 머무는 곳에 아무렇게나 잠들고 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여름잠은 허락된다. 다만 언제 어디에서 깨어날지 알 수 없을 뿐. 필요 이상으로 생각이 많고 자의식이 강한 남자는, 눈을 감고 혹은 눈을 뜨고 여름잠에 빠진다. 과거와 현재라는 단절적인 시간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는 시점을 오고 가고, 꿈과 현실, 텍스트의 층위가 혼재된 이야기 세계를 유영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 자신을 던진다는 것
팟캐스트 제작을 둘러싼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제작은 파행을 거듭한다. 남자는 세상이 다 담지 못하는 수많은 인재들을 만나지만 같이 일하겠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현실에 절망한다. 섭외의 어려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방송을 할 수 없다는 말을 상기한다.
회사 간부들은 문제의 피디들이 자신들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고, 오래 버티는 것에 불만을 품고 데드라인을 설정한다. 일주일 내로 이유를 불문하고 팟캐스트를 시작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한 달 내에 지상파 팟캐스트 최고 순위에 도달하라고 지침을 내린다. 만약 실패할 경우 비 제작부서로 발령을 내고, 방송국 기념품을 팔거나 초등학생 견학 프로그램을 맡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피디 두 사람은 캐스팅을 위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결정한다.

한 사람
남자는 삶이라는 모순과 일이라는 고통 속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 끝에 한 사람이 있다. 남자는 왜 13년 동안이나 자신에게 여자 친구가 없는지 의문을 갖다가 자신과 만나야 할 운명의 여자가 이미 죽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준 한 사람.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의 끝에서 남자는 소멸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먼 길을 돌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몰랐던 감정의 모양을 발견한다. 가장 소중한 한 사람을 캐스팅한다. 자신의 꿈을 남을 위해 쓰는 사람들이 만나 결국 서로가 서로의 꿈을 이루어준다.

각 장의 제목과 담고 있는 이야기

1. 리와인드: 사전적으로 아날로그 녹음테이프나 필름을 시작 표시의 위치까지 되감는 걸 말하는데, 마찬가지로 이 장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다. 이야기가 시간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리와인드는 영어로 Rewind이고, 이것은 다시 바람이 분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로 인해 흘려보낸 줄 알았던 뜨거운 바람이 다시 불어온다. 남자의 오랜 친구인 여자는 뉴스 앵커의 꿈을 잊어버린 상태에서 준비 상태로 시간을 되돌린다.

2. 오래된 거리: 정체불명의 노인이 좌판을 깔아놓은 거리인 동시에 팟캐스트 제작진을 구해야 하는 남자가 자주 오고 가는 곳이다. 남자는 그곳에서 오래된 이야기와 오래된 물건을 마주하며 노인에게 동화되고 섭외 작업에 열쇠가 되는 명함 하나를 받게 된다. 남자는 급조된 유령 부서에서 일하게 된 현실에 절망하며 탐사보도 피디 시절을 회상한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면서도 자신의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어떻게든 사람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멀어지기만 하는 사람들과의 거리. 남자는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다시 오래된 거리로 나선다.

3. 기억의 쓸모: 어떤 한 장면, 삶의 결정적 순간에 대한 기억은 삶 자체를 바꾼다. 여자와 여자의 쌍둥이 동생은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한다. 놓지 않는다. 기억 없는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억 없이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쌍둥이 동생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는 그녀가 채택한 기억의 방식으로 사라진 사람을 세상에 소환한다.

4. 달의 뒤편: 진실은 현상 이면에 숨어 있다. 정체불명의 노인이 지구에 한 대뿐인 카메라를 남자에게 건네며 말한다. 사람들이 왜 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비는지 모르겠다고. 그들의 꿈은 모두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달의 뒤편에 숨겨져 있다고. 그리고 황당한 얘기를 덧붙인다. 이 카메라는 꿈을 찍을 수 있다고, 카메라에는 단 한 장의 필름이 남아 있다고. 남자는 대학 시절 활동했던 방송반에 여자와 함께 찾아가 그녀가 방송하는 모습을 보며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 필름에는 남자가 생각지도 못한 사진이 담긴다.

5. 박하사탕: 씁쓸한 인생의 맛. 바스러진 박하사탕.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박하사탕. 간부들과의 생존 게임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남자와 선배 피디는 직장 생활의 씁쓸한 비애를 맛본다. 남자는 상황을 전복시키기 위해 팟캐스트에 톱스타를 섭외하려 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무위로 돌아간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찾은 국숫집에서 잊고 있던 박하사탕을 발견한다. 문을 닫은 국숫집에서 남자와 여자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 똑똑히 지켜봐야 하는 것을 마음에 새긴다.
          
6. 시나리오: 이야기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의 것일 뿐이다. 여자의 쌍둥이 동생이 쓴 시나리오를 매개로 각 장에서 전개된 이야기의 비밀이 밝혀진다. 탐사보도 피디에 대한 미련을 끝까지 놓지 못하던 남자는 그 비밀을 탐사보도하고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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