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8/22 22:20
     ‘슈퍼맨’이었던 기자 - 우희덕 숭실대 홍보팀 계장
2013-06-11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745661


퍼맨’은 더 이상 기자가 아니다. 최근 슈퍼맨 시리즈의 후속작인‘맨 오브 스틸’에서 그는 몇 십년간 유지한 직업을 버렸다. 정확히 얘기하면 주인공이 직업을 갖기 전의 얘기지만, 감독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영웅으로서 그를 기자로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빨간 팬티를 벗어던진 슈퍼맨의 옷차림처럼 변해버린 언론을 보면 말이다.

이 사회는 ‘슈퍼맨’을 꿈꿔온 기자들을 통해 자본과 권력을 견제하고, 약자들을 보호해왔다. 국민들의 인권이 신장되고, 알권리가 보장되고, 사회악이 사장된 데에는 그들의 역할이 컸다. 이처럼 언론의 공익성을 인정하기에 대다수의 공공기관과 기업에는 기자들이 출입한다. 형태상 사적 집단에게 사회 전반을 감시하는 특별한 권한과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기자도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있다. 기사보다 광고영업에 관심이 더 많은 ‘광고업자’,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 만점인 ‘복사업자’, 제목 낚시에 열을 올리는 ‘수산업 종사자’로의 변신 말이다. 소속 언론과 사익을 위해 기사를 파는 ‘슈퍼마켓맨’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더 혼란스러워진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일베’의 최대 수혜자가 언론인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그곳에서 죽치고 있으면 논란거리는 3분 요리다. 그러나 그것은 ‘죽’밖에 안 된다. 기자는 사회정의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기사로 만든 ‘밥’을 주어야 한다. 문제의 본질과 해결책은 외면한 채 사회의 오물로 ‘일용할 양식’을 지어서는 안 된다. 시류에 편승한 가십성 기사에 ‘단독’이라는 말머리를 서슴지 않는 것은 ‘독’일 뿐이다.

기자의 권리와 권력은 공익성을 담보로 주어진 것이다. 공익성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일 때 유지된다. 또 표면적 사실이 아닌, 실체적 진실을 파헤칠 때만 보석처럼 얻어진다. 기자가 그 힘을 사적으로 쓸 때 언론은 슈퍼가 되고, 기사는 사기가 된다. ‘민주화’의 뜻이 전복되고 기자의 권위가 지렁이된 세상. 초능력이 아닌, 가장 평범하고 상식적인 능력을 가진 ‘슈퍼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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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8/22 22:16
     소셜 네트워크의 종말 - 우희덕 숭실대 홍보팀 계장
2013-04-05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714099


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는 온라인에서 사람들의 관계를 형성해주는 매체다. 명목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은 ‘소식 배달 서비스’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가 과거의 그것과 대비되는 점은, 상대방의 페이지를 일일이 찾지 않아도 그들이 올린 내용을 볼 수 있고, 자신의 소식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비스에 과도한 ‘서비스’가 추가되고 있다. 군만두 서비스와는 다르다. 구독하는 신문에 광고 전단지가 우후죽순 늘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매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초창기에는 볼 수 없었던 상업적인 게시물이 많이 눈에 띤다. 일종의 계획적인 ‘배달 사고’다. 표면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소통을 표방하지만, 기업이나 개인의 마케팅 도시락이 내 집 앞에 쌓이고 있다.

‘수평적 관계’도 기울고 있다. 세계의 어떤 사람과도 1:1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은 대안적 미디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러나 실상 SNS는 하향식(top-down)으로 유명인(기업)이나 기존 미디어의 컨텐츠를 재생산하는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팔로워 수는 권력이 된지 오래다. 소소한 자신의 일상을 나누기 보다는, 단순 공유(리트윗)와 ‘좋아요’ 품앗이에 그 기능이 한정되고 있다.

SNS는 묘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매체의 성공 원인이 아이러니하게도 실패의 이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상업성(흥미), 개방성, 확장성, 접근성, 공유성, 항시성, 즉시성 등은 달리 말해 사생활 침해, 피로감과 압박감, 지인관계 설정(차단), 중독 문제 등 위기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종말의 경고는 부활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싸이월드는 저물었지만, ‘싸이 월드’가 온 것처럼 시대는 바뀐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의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SNS의 본질과 존재 이유를 생각한다면, 이용자들을 객체화하는 수익모델은 곤란하다. 물론 이용자들의 주체적인 이용의식도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뉴미디어가 순간 올드미디어로 바뀌는 세상. 사람 중심의 미디어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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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8/22 22:14
     스마트폰 없는 세상 - 우희덕 숭실대 홍보팀 계장
2013-03-05 이투데이 지면 게재
칼럼 링크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699142


마트폰 없는 세상은 어떨까. 비틀즈의 ‘Imagine’ 선율에 맞춰 그런 세상을 상상해본다. 쉽지 않다. 이과수 폭포처럼 쏟아지는 통신사 광고와 신제품 폭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손끝의 세계. ‘바보 상자’와는 달리 비판하기 힘든 이름을 가진 태생적 신분은 가히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다.

불과 십수 년 사이, 스마트폰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은 초코파이와 와이파이의 관계만큼 뒤바뀌었다. 상상하기 힘들어졌다. 세계 스마트폰 사용자 10억명 시대. 스마트폰이 세상을 ‘접수’했다. 스마트폰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 가족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비교한 최근의 사진을 보면 납득이 간다. 그렇다면 세상은 과연 그 이름에 걸맞게 스마트해졌는가.

스마트폰에는 ‘스마트’가 없다. 붕어빵만 그런 식인 줄 알았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사용하는 것은 어렵다.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각자 스마트폰만 만진다거나, 늦은 밤에도 아랑곳없이 게임 초청 메시지를 날린다거나, 하루에도 수십 차례 SNS에 들락날락하는 일은 흔하다. 그저 도구이고 수단일 뿐인 스마트폰이 이제는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목적 자체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불안과 종속을 야기한다. 기기 손상과 분실 걱정, 배터리 잔량과 데이터 사용에 대한 조바심, 연결에의 압박과 습관적 사용, 업그레이드 갈망 등 최첨단 디지털 기기가 만들어내는 아날로그적 불안이 산업을 형성하고, 비용 지불로 이를 해소하라고 강요한다. 마치 동물원에 갇힌 동물처럼 ‘정형행동’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보며, 스마트폰이 그들을 가지고 논다고 느끼는 것은 무리일까.

스마트폰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디지털 바보’, ‘아날로그 똑똑이’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 머물거나, 파발이나 봉화로 소통하던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사람의 문제고 주체의 문제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편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없어도 자신의 삶이 흔들리지 않아야 비로소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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