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 17:39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 제주 표류기
섬을 달린다. 바람이 달다. 제주의 바람은 결이 다르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따라 금방이라도 귤꽃 향 가득한 감귤 밭이, 울창한 삼나무 숲이,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질 것만 같다.

최고의 드라이브를 위해 고가의 차량을 빌렸다. 뚜껑이 열리는 빨간색 스포츠카. 하루 대여료가 호텔 숙박비와 맞먹는다. 기름은 하마처럼 먹는다. 길에 돈을 뿌리고 다니는 셈이지만 멈출 생각은 없다. 계산기를 들고 여행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길고 긴 인생에서 하루쯤은 오늘만 살 것처럼 살고 싶다.

공항 주변을 벗어난 제주의 도로는 월급날 퇴근길만큼 아름답다. 눈에 익은 풍경들도 새롭다. 서귀포 중산간을 가로지르는 산록남로에 이어 녹산로를 달리다 보면,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오른다.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제주의 시계처럼 느리게 돌아간다. 따스한 빛을 머금은 억새가 하늘하늘 흔들린다. 일렁이는 은빛 물결에 젖어 들다 보면 어느새 해안도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드문드문 야자수가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고, 검은색 화산 지형과 눈부신 백사장이 교차한다. 언뜻 보면 다 비슷해 보이는 바다 풍경이지만, 똑같은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제주에 매료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바다가 있다. 파도가 밀려드는 모래밭에 사랑을 새기는 연인들처럼, 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달린다. 나를 추월하는 이들 너머로 끝없이 바다가 펼쳐진다.

때로는 길을 헤매도 좋다. 길을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관광지도에 없는 숨겨진 곳들이 그렇게 발견된다. 호젓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는 포구, 이름 모를 작은 오름, 낮은 돌담에 아기자기한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 노루가 뛰어노는 신비한 곶자왈까지. 파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질 때까지, 나는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 많은 아이이고 싶다.

잠시 잊었다. 제주에서는 마음은 비우고 배는 채워야 한다. 뱃살에 손을 얹고 굳게 다짐한 대로, 돌하르방에 맹세코, 하루에 다섯 끼는 먹어야 한다. 공항 근처 해장국집에서 몸국을 먹고, 표선에 위치한 국숫집에서 멸치국수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제 시작이다. 기왕이면 한 자리에서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서귀포 전통시장에 스포츠카를 주차한 나는 큰손이 된 기분을 한껏 만끽한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아 목구멍이 근질근질하다. 그런 마음으로 마늘통닭, 딱새우회, 오메기떡, 한라봉을 구입한다. 얼마 들이지 않고 세상을 다 가졌다.

제주에 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가는 곳. 나의 바다, 세화해변을 거닌다. 주변이 석양으로 붉게 물든다. 더없이 완벽한 하루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찜찜하다. 뭔가 하나 빠져 있었다. 그때였다.

“저기, 제가 혼자 와서 그런데, 같이 흑돼지 먹지 않을래요?”

그것은 흑돼지였다. 그리고 그걸 같이 먹어줄 그녀였다. 아름다운 해변의 여인.

“흑돼지든, 백돼지든 상관없으니 빨리 가시죠.”

그래야만 했다. 그랬어야만 했다.

부푼 꿈을 안고 제주 여행을 시작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사고가 났다. 새별오름 근처 나홀로나무를 보러 가는 길. 길에 쓰러져 있던 나무를 피하다가 차가 도랑으로 떨어졌다. 보닛이 찌그러졌고, 범퍼가 완파됐으며, 바퀴 한 쪽이 뒤틀렸다.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 저렴한 차를 빌리고, 별도의 사고 보상 보험도 들지 않았는데, 이걸 물어줄 돈이면 빨간색 스포츠카를 빌려, 가고 싶은 곳을 다 가고, 먹고 싶은 걸 다 먹는 것도 가능하겠다. 렌터카 업체에서는 담당자와 연락이 되지 않아 출동 업무가 지연되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말뿐이다.

제주의 날씨는 변덕스럽다. 비와 바람이 갈수록 거세진다. 우산은 속절없이 망가졌고, 어디선가 미역이 날아와 얼굴을 때린다. 내 머리다. 저 앞에 한라산이 아닌 먹구름이 만든 킬리만자로가 보인다. 절로 처절한 배경 음악이 깔린다. 어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나는 절규한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우희덕_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위클리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그 열여섯 번째 칼럼입니다. 사실에 기반한 제주 표류기입니다. ^-^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WpK2UEDGJM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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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6 17:34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 할매와 밥상
또 ‘먹방’인가.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관심에서 멀어진 프로그램 장르가 먹는 방송, 즉 ‘먹방’이었다. 자극적인 메뉴 선정과 과도한 음식의 양, 자의적인 평가로 소개되는 맛집, 물불 안 가리는 상업성에 질려 버렸다. 무엇보다 배를 채우는 과정만 있을 뿐 가슴에 남는 이야기가 없었다.

유튜브에 <할매와 밥상>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왔을 때, 때늦은 맛집 콘텐츠라고 생각했다. 동어 반복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시청하지 않았다. 라디오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조금은 조용하게 맛집을 즐길 수 있게 했던, 신뢰하는 여행 작가마저 유튜버 대열에 뛰어드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뭐든지 시각화되지 않으면 실체를 믿을 수 없고, 주체로서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 된 건 아닌지 씁쓸했다.

시간은 흐르고 풍경은 바뀌었다. 동네를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면 누구나 목격하게 되는 장면들. 문득 잊고 있던 프로그램이 떠오른 건,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던 식당이 문을 닫으면서였다. 그곳의 주인 할머니를 통해 할매라는 단어가 새삼스레 마음에 꽂혔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맛집이 사라지는 지점에서 다시 맛집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다.

<할매와 밥상>은 기본적으로 노포를 다룬다. 세월이 켜켜이 내려앉은 오래된 식당. 시간을 이기는 맛의 비밀을. 한때는 그런 식당에 대한 막연한 환상 때문에 혼자서 전국 이곳저곳을 탐방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밥 이상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거란 기대와는 달리 현실 세계는 딴판이었다.

내가 한 식당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면서 물었다.

“계십니까? 지금 밥 됩니까?”

“어떤 무식한 놈이 이른 아침부터 밥을 달라고 해!”

내가 주인 할머니 앞에 얼굴을 내보이며 말했다.

“그게 접니다.”

“….”

정감이 넘치는 욕을 듣거나 감칠맛 나는 눈칫밥을 먹는 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1인분은 안 된다는 식당도 꽤 있었는데, 그런 경우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도 먹을 수 있는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이용해야 했다. 어렵사리 밥상은 받았으나 찬밥 대우를 받은 적도 있었다.

“제가 사실 소설가인데 몇 가지 좀 여쭤 봐도 될까요?”

“됐고, 빨리 먹고 나가는 게 날 도와주는 거야.”

“여기 벽에 사인은 필요 없으시죠?”

“됐으니까, 밥값만 내고 가.”

단순히 돈을 지불하고 음식을 사먹는 게 아닌, 사람의 마음을 산다는 것. 나이 드신 분들과 서로 공감하고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됐다. 그래서 노포를 소재로 한 <할매와 밥상>이 내게는 다르게 보인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운영하는 분식집, 재개발로 원주민이 떠난 자리에 유일하게 남은 식당, 절대 방송 출연은 안 하는 만둣집, 간판 없는 가게와 전 세계에 하나뿐인 메뉴를 파는 곳까지. 그런 곳에 직접 찾아가 주인의 개인사와 식당의 발자취에 대해 격의 없이 대화하는데,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분들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머니, 앞으로 30년은 더 하셔야죠?”

“아이고, 30년이면 나 없어져!”

거기서 나오는 이야기는 소설보다 힘이 세고, 코미디 프로그램보다 더 희극적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무겁지 않고, 인위적인 연출이 없어서 마음에 더 와 닿는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노포의 매력, 찾고 있던 맛이 저런 게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이야기일지라도, 그걸 이어 붙이면 하나의 기록이 된다. 역사가 된다. <할매와 밥상>이 상업성의 초월이나 숭고함을 기치로 내건 방송은 아니지만, 이런 소재의 콘텐츠가 존재한다는 건 고마운 일이 아닐까. 오래된 맛을 지키는 프로그램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참는 것, 맛집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다. 그래서 제작진도 조심스러워 한다. 노포를 더 오래도록 지키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가게를 찾지 않는 것이다. 방송은 방송으로만 즐기는 것이다.

“이거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매회 프로그램이 끝나기 전 나오는 질문에 식당 주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하는 데까지, 힘닿는 데까지 해야지.”

나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언젠가 드문드문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외지고 낡은 식당에서 따뜻한 밥 한 공기 먹을 수 있기를. 깊은 인생의 맛을 발견할 수 있기를.


우희덕_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위클리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그 열다섯 번째 칼럼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유튜브 방송에 대해 써보았습니다.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V971g4DGJM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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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27 20:02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 거미와 고양이, 그리고 레몬밤
생명은 어렵다.

“넌 그야말로 행운아다. 도마뱀과 같이 사니까.”

호주 어학연수 시절, 나이 지긋한 호주인, 집주인이 말했다. 뜨악했다. 내 방에서는 크기가 작은 야생 도마뱀이 자주 목격됐다. 외계인을 닮은 녀석은 창문 틈새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벽을 제멋대로 기어올랐다.

좀처럼 늘지 않는 영어 실력에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방값 좀 깎아줘요. 룸메이트가 파충류란 얘긴 없었으니.”

그가 파안대소하며 내게 말했다.

“너는 돈을 더 내야해. 도마뱀은 너의 가장 소중한 걸 지켜줄 거야. 행운을 걷어차지 마.”

처음에는 집주인의 회피 전략이라고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던진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도마뱀은 작은 생명이었다. 그리고 해충 킬러였다. 도마뱀에게 그렇듯, 내게 가장 소중한 것 역시 생명이었다. 도마뱀과의 불편한 동거가 가져다 준 행운일까. 그곳에 오랜 시간 머물렀지만 벌레에 물린 적도, 아팠던 적도, 병원에 간 적도 없었다. 집에서 첫 데이트. 도마뱀을 보고 놀란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것 말고는 딱히 큰 피해는 없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모종의 기시감을 마주한다. 거미가 천장을 기어간다. 곳곳에 거미줄이 보인다. 무생물로만 채워진 내 방에는 거미들이 산다. 전생에 나는 거미였을까, 아니면 지금 스파이더맨인데 그걸 모르고 사는 것일까. 거미가 나를 물거나 내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는 이상, 나는 거미를 해치지 않는다. 거미 요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 덕분에 모기에 물린 기억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득하다. 살충제는 한참 남았는데, 유통기한은 얼마 남지 않았다.

혹자는 당신의 생명존중사상이 특출하거나 친환경적인 삶을 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거미를 무서워하고, 청소를 싫어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말에는 대응할 가치를 못 느낀다. 다만 척추부터 온몸의 뼈가 시큰할 뿐이다.

늦은 주말 저녁, 동네를 산책하던 나는 전방 20미터 지점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달밤에 체조도 아니고, 어떤 사람이 커다란 트럭 아래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섰다. 트럭 주인이 차량을 정비하는 게 아니었다. 20대로 보이는 여성이 어둡고 낮은 곳을 향해 손길을 내밀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앉아 안을 들여다봤다. 설마설마했는데, 거기에, 고양이가 있었다. 길이 집인 고양이. 차가운 트럭 아래가 따뜻한 고양이. 고양이는 내가 지켜봐도 놀라지 않고, 그녀가 건넨 물과 사료를 먹었다. 그곳엔 이미 어떤 경계가 허물어져 있었다.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나는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거기에 생명이 있었고, 온기가 있었다.

모두가 쉬고 있는 시간,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생명을 돌보는 일. 그런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려운 문제였다. 내가 목도한 장면이 모든 사람이 보기에 옳은 행동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에게 사라져서는 안 되는, 뺏어서는 안 되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고양이는 언젠가 길을 떠나겠지만, 소멸하지 않는 무언가가 이 길 위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생명을 쉽게 키우지 못한다. 그나마 책임감과 죄책감이 덜한 식물 키우기에 몇 번 도전해봤지만, 허사였다. 신록을 한껏 뽐내던 산세베리아, 상대적으로 관리하기 쉽다는 품종도 내 손을 거치면 여지없이 말라 죽었다. 식물에게 인격이 있었다면 나는 법정최고형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생명을 다룬다는 것은 양가적이다. 나처럼 아예 건드리지 말거나, 일단 건드렸다면 후배처럼 해야 한다. 비닐하우스 같은 남자. 그가 들려준 이야기처럼 손이 많이 가는 걸 감수해야 한다. 그는 추석 연휴 중간에 회사에 있는 식물들이 말라 죽을까봐 물을 주러 갔다고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이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회사 화단에 심어 놓은 레몬밤. 역대급 장마와 태풍에도 살아남은 작은 허브가, 허망하게도 제초기에 생을 마감했다. 작업자는 그게 잡초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준 사진 한 장. 입과 줄기가 산산이 잘려 나간 주변에서 작은 싹이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키가 작아졌을 뿐 웃고 있었다. 레몬밤은 살아 있었다.

생명은 어렵다. 살아가는 것도, 공존하는 것도, 무언가를 키우는 것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쉬운 생명은 없다. 생명은 어렵다.


우희덕_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위클리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그 열네 번째 칼럼입니다. 이제 연재 마감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VSpnPQDGJM000&pageIndex=1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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