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7 20:02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 거미와 고양이, 그리고 레몬밤
생명은 어렵다.

“넌 그야말로 행운아다. 도마뱀과 같이 사니까.”

호주 어학연수 시절, 나이 지긋한 호주인, 집주인이 말했다. 뜨악했다. 내 방에서는 크기가 작은 야생 도마뱀이 자주 목격됐다. 외계인을 닮은 녀석은 창문 틈새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벽을 제멋대로 기어올랐다.

좀처럼 늘지 않는 영어 실력에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방값 좀 깎아줘요. 룸메이트가 파충류란 얘긴 없었으니.”

그가 파안대소하며 내게 말했다.

“너는 돈을 더 내야해. 도마뱀은 너의 가장 소중한 걸 지켜줄 거야. 행운을 걷어차지 마.”

처음에는 집주인의 회피 전략이라고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던진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도마뱀은 작은 생명이었다. 그리고 해충 킬러였다. 도마뱀에게 그렇듯, 내게 가장 소중한 것 역시 생명이었다. 도마뱀과의 불편한 동거가 가져다 준 행운일까. 그곳에 오랜 시간 머물렀지만 벌레에 물린 적도, 아팠던 적도, 병원에 간 적도 없었다. 집에서 첫 데이트. 도마뱀을 보고 놀란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것 말고는 딱히 큰 피해는 없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모종의 기시감을 마주한다. 거미가 천장을 기어간다. 곳곳에 거미줄이 보인다. 무생물로만 채워진 내 방에는 거미들이 산다. 전생에 나는 거미였을까, 아니면 지금 스파이더맨인데 그걸 모르고 사는 것일까. 거미가 나를 물거나 내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는 이상, 나는 거미를 해치지 않는다. 거미 요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 덕분에 모기에 물린 기억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득하다. 살충제는 한참 남았는데, 유통기한은 얼마 남지 않았다.

혹자는 당신의 생명존중사상이 특출하거나 친환경적인 삶을 살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거미를 무서워하고, 청소를 싫어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말에는 대응할 가치를 못 느낀다. 다만 척추부터 온몸의 뼈가 시큰할 뿐이다.

늦은 주말 저녁, 동네를 산책하던 나는 전방 20미터 지점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달밤에 체조도 아니고, 어떤 사람이 커다란 트럭 아래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섰다. 트럭 주인이 차량을 정비하는 게 아니었다. 20대로 보이는 여성이 어둡고 낮은 곳을 향해 손길을 내밀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앉아 안을 들여다봤다. 설마설마했는데, 거기에, 고양이가 있었다. 길이 집인 고양이. 차가운 트럭 아래가 따뜻한 고양이. 고양이는 내가 지켜봐도 놀라지 않고, 그녀가 건넨 물과 사료를 먹었다. 그곳엔 이미 어떤 경계가 허물어져 있었다.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나는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거기에 생명이 있었고, 온기가 있었다.

모두가 쉬고 있는 시간,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생명을 돌보는 일. 그런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려운 문제였다. 내가 목도한 장면이 모든 사람이 보기에 옳은 행동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에게 사라져서는 안 되는, 뺏어서는 안 되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고양이는 언젠가 길을 떠나겠지만, 소멸하지 않는 무언가가 이 길 위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생명을 쉽게 키우지 못한다. 그나마 책임감과 죄책감이 덜한 식물 키우기에 몇 번 도전해봤지만, 허사였다. 신록을 한껏 뽐내던 산세베리아, 상대적으로 관리하기 쉽다는 품종도 내 손을 거치면 여지없이 말라 죽었다. 식물에게 인격이 있었다면 나는 법정최고형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생명을 다룬다는 것은 양가적이다. 나처럼 아예 건드리지 말거나, 일단 건드렸다면 후배처럼 해야 한다. 비닐하우스 같은 남자. 그가 들려준 이야기처럼 손이 많이 가는 걸 감수해야 한다. 그는 추석 연휴 중간에 회사에 있는 식물들이 말라 죽을까봐 물을 주러 갔다고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이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회사 화단에 심어 놓은 레몬밤. 역대급 장마와 태풍에도 살아남은 작은 허브가, 허망하게도 제초기에 생을 마감했다. 작업자는 그게 잡초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준 사진 한 장. 입과 줄기가 산산이 잘려 나간 주변에서 작은 싹이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키가 작아졌을 뿐 웃고 있었다. 레몬밤은 살아 있었다.

생명은 어렵다. 살아가는 것도, 공존하는 것도, 무언가를 키우는 것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쉬운 생명은 없다. 생명은 어렵다.


우희덕_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위클리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그 열네 번째 칼럼입니다. 이제 연재 마감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VSpnPQDGJM000&pageIndex=1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701

                                          posted by woogun | 일상다반사 | 관련글(trackback) | 댓글달기


이 글의 관련글(trackback) 주소 :: http://www.woogun.net/tt/rserver.php?mode=tb&sl=399
이름 ::   비밀번호 ::  
홈페이지 ::    비밀글로 등록
                   광고성/음란성 글이 아닙니다.

    1  2  3  4  5  6  7  8  9 ...   331    
 
        
분류 전체보기
일상다반사
감성코드
호주 이야기
뉴질랜드 이야기
말레이시아 이야기
일본 이야기
추억의 사진·영상
 
 
  Total 415335  Today 174


              ad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