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27 12:47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길 위에서
길 위에서 수평선을 가로지른다. 노을해안로를 따라 펼쳐지는 제주 서쪽 바다, 흐린 오후의 겨울 바다가 온몸에 밀려든다. 거친 바람 속을 참 오래도 걸었다. 최백호의 <길 위에서> 가사처럼 대답 없는 길을 외롭게 걸어왔다. 문득 돌고래가 보고 싶어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신도포구를 찾았다. 이곳 해안가에서는 심심찮게 남방큰돌고래를 목격할 수 있는데, 이를 반영하듯 돌고래 조형물과 전망대가 마을의 상징처럼 세워져 있다.

어느덧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마을의 상징이 하나 더 늘어날 뻔했다.

돌고래를 기다리다 돌이 된 사람.

정신이 혼미하다. 바람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린다. 파도의 포말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이윽고 머리가 물미역이 됐다. 바다색이 더 깊고 짙어진 늦은 오후까지 돌고래는 나타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아 얼굴이 얼어붙었는데도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지 않고서는 생각의 공백을 메울 수 없었다.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인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제주에 온 게 맞는가, 굳이 왜 보기만 해도 시린 겨울 바다에서 돌고래를 봐야 하는가. 온갖 상념들이 들끓는 와중에 끝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과연 돌고래를 보고 안 보고가 그렇게 중요한가?

지나온 과정을 되돌아본다. 돌고래를 보기 위해 멀리 걸어왔던 길, 스쳐 지나간 풍경들, 오로지 바다에 몰입한 시간들, 한없이 크고 넓은 세계를 유영하는 상상.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뿐이었다. 조금 망가지고,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해도, 훌훌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제가 아니라 그 과정을 즐기는 행위다. 때로는 여행 도중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데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이다.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 해안도로에 잘못 들어섰을 때였다. 내비게이션이 엉뚱한 길을 안내해서 짜증이 나던 찰나, 투명한 햇살이 찬란하게 길 위를 비추었다. 순간 미처 알지 못했던 아름다운 해안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상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는데 생각이 달라졌다.

아, 이래서 돌아왔구나. 이런 풍경을 보기 위해 내가 길을 잘못 왔구나.

나는 길 위에 서 있다. 여전히 길 위에서 나침반을 들고 있다. 앞으로의 여정이 어떻게 채워질지 여행자인 나조차도 알 수 없다. 어떤 길을 걸을지,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떠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난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오늘도 발을 내딛는다.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열여섯 번째, 마지막 칼럼입니다. 그동안 제주 표류기를 읽어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칼럼 링크
http://bit.ly/3jq4MsZ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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