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05 18:10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 제주의 맛
식도락을 빼놓고 여행을 말할 수 있을까. 여행지가 제주라면 어떨까. 미식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미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제주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맛의 향연이 펼쳐진다. 흑돼지구이, 옥돔구이, 말고기정식, 갈칫국, 몸국, 고사리해장국, 성게미역국, 각재깃국, 보말칼국수, 고기국수, 다금바리회, 방어회, 고등어회, 딱새우회, 꽁치김밥, 오메기떡, 당근케이크 외에도 제주 식재료를 활용한 다양한 요리는 제주의 맛이자 여행의 맛 그 자체다. 결국 여행은 추억으로 남고 추억은 맛으로 기억된다.

내가 제주에 산다는 이유로 지인들이 종종 현지 맛집을 물어온다. 여행하면서 꼭 가봐야 하는 식당이나 숨겨진 맛집 같은 걸 알려달라는 게 골자다. 그런 의뢰를 받을 때마다 나는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좋아하는 곳들을 소개할 수 있어 설레기도 하지만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간의 사례를 되돌아보면 맛집 소개만큼 쉽고 또 어려운 것은 없다. 같은 음식점을 두고 “거기 정말 최고더라”는 상찬도 들은 반면에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혹평도 돌아왔다.

굳이 맛집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좋다. 제주에서 내가 좋아하는 집들은 대체로 소박하고 수수한 곳들이다. 큰맘 먹고 가야 하는 곳이 아닌, 불현듯 그 맛이 생각 날 때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서귀포시 표선면에 위치한 ‘춘자멸치국수’는 할머니가 운영하는 노포다. 이곳의 멸치국수는 내가 제주에서 끝까지 놓지 않을 단 하나의 음식이다. 이른바 소울푸드인 셈이다. 그 모양새는 무엇 하나 특별한 게 없다. 투박한 양은 냄비에 푹 삶아낸 중면과 적당한 농도의 멸치육수, 고명으로 올린 파와 고춧가루가 전부다. 단순함의 미학인 평양냉면만 해도 소고기로 육수를 내야 하기에 재료비가 많이 들어간다. 멸치국수는 사실 멸치가 전부다. 나는 이렇게 간단한 재료로 이 정도의 맛을 내는 음식을 본 적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한없이 가벼운데 더없이 진한 맛.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마음도 푸근해진다.

제주 시내에 있는 식당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함흥면옥’이다. 도내 대물림 맛집으로 선정된 이 냉면집은 6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한다. 이곳에서는 수준 높은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성격의 냉면이 건네는 묘한 중독성은 식당 옆으로 이사가고 싶은 욕구마저 불러일으킨다. 허름한 외관이지만 푸른 바다를 뒷마당으로 품은 곳. 구좌해안로에 인접한 ‘잠녀네집’은 녹진하고 고소한 전복죽이 일품이다. 그간 꽤 많은 곳에서 전복죽을 먹어봤는데 여기보다 맛있는 곳은 없었다. 또 이곳의 모듬 해산물은 조연이 아닌 당당한 주연으로 한껏 미각을 끌어올린다.

한라산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사먹었던 사발면이 그렇게 맛있었던 이유는, 흔하디흔한 인스턴트 라면이 그곳에서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맛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여행의 맛은, 제주의 맛은 특정인의 향유물이 아닌 모든 여행자에게 열려 있는 특권이다.


우희덕_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제주 표류기> 그 열다섯 번째 칼럼입니다. 제주에 있는 그 많은 식당 언제 다 가보나.        

칼럼 링크
http://bit.ly/3hZfciR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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