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8 12:27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 추석전(秋夕傳)
명절에 대한 회의론. 민족 대이동 과정에서 들려오는 절규와 볼멘소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겉으로는 길게 이어지는 연휴일 뿐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민초들의 희로애락, 우여곡절, 다사다난이 함축적으로 드러나는 시기.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의 애환을 집대성한 이야기판이 매년 벌어지니, 바로 추석전(秋夕傳)이다.

추석전은 대개 장거리 운전과 함께 시작된다. 나는 매년 부모님을 고향에 모셔다 드리는데, 두 분은 내 체력을 과대평가하며 중년의 아들에게 청년 정신을 북돋아 주셨다.

“운전하느라 힘들지?”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 젊은 놈이 힘들긴 뭐가 힘들겠어.”
“…….”

추석 연휴인 걸 감안하면 딱히 힘들다고 할 수도 없었다. 꽉 막힌 고속도로를 100킬로미터만 더 가면 됐다. 가다 서다를 무한 반복하니 지루할 새도 없었다. 평소 운동 부족으로 다리에 쥐가 나니, 차를 버리고 걸어다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운전 중 졸음도 일절 오지 않았는데, 친절하게도 도로 곳곳마다 대문호가 쓴 듯한 경구가 걸려 있었다.

졸음운전의 종착지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길게 늘어선 차들 사이에 갇혀 있다 보면, 유년 시절의 한 장면이 나를 잠식한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 거북이가 그려진 고속버스를 타고 귀경하는데, 열 시간 넘게 버스에 갇혀 있었다. 버스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짜증으로 점철된 사람들, 그들의 날숨으로 데워진 공기와 출처를 알 수 없는 냄새로 가득했다.

앞길이 구만리 같다는 게 이런 뜻이었을까. 참을 만큼 참았다. 생리적 한계 상황에 내몰린 나는 초인이었고, 신 앞에 선 단독자였다. 구토를 하든, 실례를 범하든, 무슨 일이든 벌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부모님은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내 온정의 손길이 답지했다.

무엇이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는가. 내 오른손엔 빈 병, 왼손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추석전은 일가친척들과 만남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각본 없이 펼쳐지는 대화의 향연. 장거리 운전으로 지친 내게 필요 이상의 관심이 쏟아진다.

“당숙,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
“나이 들어 보여요.”
“네가 기어 다닐 때부터 봤으니까 그렇겠지.”

이어서 고모님이 등장하신다. 대화가 끊기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 오지랖이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으신 소통의 아이콘이시다.

“그래, 만나는 사람은 있어? 결혼할 나이를 훌쩍 넘겼으니 불효가 막심하구나. 아이고, 내가 주책이다. 요새는 결혼 안 해도 혼자 잘만 살더라. 그래, 네 인생, 떠밀려서 결혼할 필요 없다. 암, 그렇고말고. 그래도 사람 구실하려면 부모님께 손주는 보여드려야 할 텐데….”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영혼이 없었다.

추석전의 백미는 전이다.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는 전이 추석 때는 마구 당기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형수님들은 쉴 새 없이 팬에 기름을 두르고 전을 부친다. 고역이다. 보다 못한 형님들이 나선다.

“우리 가족은 이제 전 같은 거 그만 부칩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잘 익은 전은 형님들 입 속으로 들어간다. 반주가 곁들여진다. 삼삼오오 얼굴이 불콰하다. 가을이 깊어간다. 윷놀이 동아리와 고스톱 소모임이 나뉘어 경제 활동을 전개한다. 시끌벅적하고 화기애애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집안의 최고령 어르신께서 목청껏 소리 높여 말씀하신다.

“이렇게 화목한 가정을 보니,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어르신께서는 긴말 없이 고가의 홍삼 추출액과 인삼 절편을 정성껏 챙겨 드신다.

추석전을 없애야 할까, 바꿔야 할까. 나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새로 쓸 수 있다고 믿는다. 부모님이 먼저 제안하신다.

“이번 추석에는 고향에 내려가지 말자.”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세상. 정이 있다면 선물과 용돈을 보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고속도로에서 얼마나 더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다량의 비말이 오고 가는 덕담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더 이상 전을 부치지 않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장기간 본질이 아닌 것들로 고통받은 우리. 우리 모두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더 행복한 추석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 나는 모두가 주인인 추석전을 쓴다. 방구석에서. 내가 올해 추석을 보낼 방식으로.


우희덕_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발행 주간지 <위클리 공감>에 연재하는 <우희덕의 코미디 로드> 그 열세 번째 칼럼입니다. 저의 코미디 세계가 그대로 반영된 글입니다. 모두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

칼럼 링크
http://gonggam.korea.kr/newsView.do?newsId=GAJUWh5oDGJMP000
http://gonggam.korea.kr/fcatalog/ecatalog5.jsp?Dir=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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